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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 될 씨앗 Jan 02. 2022

스타트업 다녀봐서 할 수 있는 이야기

나는 여전히 마케터를 꿈꾼다.

퇴사를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문득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인가 생각해본다. 어쨌든 일은 해야 할 테니 결국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혹은 어떤 일을 재밌어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이직할 곳을 고려해야 한다. 일은 정말 하기 싫지만 결국 해야 할 거라면 가장 나와 잘 어울리는 일을 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 당연히 마케팅 일을 계속해야 하지만, 마케팅의 영역도 수많은 교집합을 갖고 있으니 내가 어떤 부분에 더 집중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 그걸 생각하려니 문제는 내가 원하는 일이 뭔지 알아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한 회사가 있는가 하는 거였다. 그래, 그 아이러니가 나를 자꾸 좀먹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알아도 그런 사람을 뽑는 회사가 있는가 하는 것.


물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문제는 내가 예상 혹은 기대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하게 업무가 엉켜있는 회사가 많다는 것인데, 나의 두 번째 회사가 그랬다.


스타트업 다녀봐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으레 스타트업은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진리의 회바회(회사 by 회사)라 했으니 가보지 않은 회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고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믿고 스타트업에 발을 들인다. 그 9개월의 경험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 줄도 모르고.


스타트업에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아주 다양한데, (1)업무 경계가 없고 (2)사수도 없고 (3)일의 계획 대신 오늘 해야 하는 일만 있으며 (4)사업 아이템 하나를 진득하게 이어나가질 못하고 (5)시잖은 복지로 생색내며 (6)열정을 빌미로 젊은 인력을 갈아서 쓰는 곳들이 보통 스타트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가기 전이라면 회사가 이럴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에 꼭 넣어두고 가길 바란다.


9개월간 스타트업 마케팅팀에 몸 담으면서 든 생각은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였다. 4년의 경력을 갖고 있으니 뭔가 해야 하고 뭘 먼저 해보면 좋겠는지 머릿속에 그림은 그려졌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경험치가 부족하니 나보다 레벨이 높은 사람의 확신이나 조언이 필요했건만 슬프게도 스타트업에는 나보다 레벨이 높지만 직업이 다른 대표만 있었다. 내가 레벨 15의 마법사라면 대표는 레벨 25의 전사 같은 느낌이랄까? 전사에게 조언을 구하다 보니 마법사인 나는 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나는 마법사인데 전사가 주는 조언대로 공격을 하니 마법을 쓰면서도 계속 몹들에게 몸빵을 맞고 있었다. 마법사는 물몸이라 몸빵을 최소화해야 하는데요.......


비유를 하자면 이렇지만 아무튼 마케팅 일을 하다 보면 인사이트가 생기고 다음 스텝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곳에서의 마케팅은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과거 데이터가 없고 현재에 집중하다 보니 내일이 없어서 그냥 당장 해야 하는 일들만 넘쳐났다.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잘했으면 그에 대한 당근도 있어야 하는데 당근은커녕 계속 열정만을 요구했다. 채찍이라고 하기에는 목표가 없으니 강력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그치기만 하는 것이라 그것도 아주 많이 답답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을 위한 일일까? 일단 나를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회사의 서비스라는 것이 한 번 개발하고 나면 100% 완벽하며 이 시대에 다시없을 최고 울트라 메가 히트작!이 아니기 때문에 속 끊임없이 발전을 해야 한다. (1)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불편을 느끼는지, (2)서비스를 이용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용하지 않는지, (3)이용하다가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계속 듣고 서비스에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이토록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온라인으로만 결제가 이루어지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상주하는 개발자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시작된 발상일까. 하루에도 자잘한 오류가 몇 개씩 터지고 수정하고 보완할 부분이 끊임없이 보이는데 그건 나중에 건드리자고 하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문제를 하나씩 짚으면서 고쳐야 한다, 이 부분이 문제다 보고를 하면 모든 일은 내가 떠안게 되고 나는 원래 하는 일도 있는데 일이 추가로 더 생기기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회사를 위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내가 얻는 것도 없으면서 지금 뭐하는 짓인가 생각하게 됐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은 누구를 위한 일일까? 이건 나를 위한 것도 회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에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입사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갔으니 한 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들이 떠나가면서 생기는 문제는 내 일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일은 그대론데 사람이 부족하면 인력 충원을 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건만 도대체가 이 조직은 사람을 뽑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출이 안 나와서 사람을 뽑을 수가 없단다. 그럼 (1)그전에는 그 인력 어떻게 감당는지 (2)그 사람들이 그만둔다고 안 하면 자를 생각이었는지 (3)사람이 없으면 일이라도 줄일 것이지 일은 왜 자꾸 벌리는 건지-원래 하던 사업이 아니라 다른 사업을 또 시작하고 있었다- 또 수많은 의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만둔 사람들의 빈자리를 채워줘야 나도 내 원래 일을 한다고 레벨 25 전사에게 끊임없이 어필했지만 뽑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그 말인즉슨 나에게 그 일을  시켜도 얼레벌레 굴러가니까 그냥 이대로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사진 수평을 맞춰가며 보정을 하다 보니 문득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지금 나가야 한다."


사실 스타트업에 몸 담고 있던 9개월 동안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손에 꼽힐 정도로 계속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앞선 일들이 쌓이자 구석에 있던 생각이 점점 마음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퇴사를 지르기까지 그리 오랜 고민도,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마 나보다 먼저 그곳을 떠난 동료들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전에 일했던 곳과 다른 환경이라 도움이 된 부분도 있었고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다. 동료들이 모두 내 또래였고 분위기도 자유로웠으며, 마케터로서는 이렇게 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는 부분들이 큰 무리 없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그전에 일하던 곳은 컨펌 라인이 너무 길어서 기획만 해놓고 실행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훨씬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 일이 어떤 회사에서 가능한 건지 깨닫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되었다. 브런치에 브랜드 마케터가 되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 역시 스타트업을 경험하고 나니 내가 생각하는 마케터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기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스타트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스타트업에 절대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회사에 가기 전 어떤 험난한 일들이 나를 괴롭힐지 조금이나마 그려보았으면 하는 마음과, 나를 갉아먹는 곳에서는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나 역시도 스타트업을 겪었기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었으니 영 쓸모없는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이런 경험 하기 전이라면 굳이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은 발전한다. 회사든 상품이든 가치든 사회든, 사람이 변하기에 그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시각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변할 마음이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몸담고 일하는 회사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비자와 함께든 직원과 함께든 살아 숨 쉬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싫으니까 조금만 더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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