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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Jun 15. 2020

정수리에 떨어지던 물방울은

모든 채비를 마치고 나가기 전 날씨를 확인했다. 여름이 서둘러 오려는지 아침부터 해가 따사롭다 못해 뜨거웠다. 식물도 사람도 싱그러워지는 계절 ‘여름’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눈치 없이 열려버리는 땀구멍들이 참 곤혹스럽다. 땀이 유독 많은 나에게 가장 싫어하는 계절로 꼽힐 수도 있으나, 그 어떤 계절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풍경들을 다채롭게 담아주기에 일상의 불편함은 감내해버린다. 


아, 비가 온다는 예보. 저녁 7시 즈음부터 떠 있는 구름 아이콘들이 뭉게뭉게 해를 가리고 있었다. 신발장에 두었던 빨간 우산을 집어 들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오니 공기가 쿰쿰해졌다. 그 쿰쿰한 냄새가 살짝 반가웠다. 챙겨 온 우산이 펴지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못내 아쉬웠달까. 마음껏 펴지 못한 구겨진 내 마음처럼 우산도 아무렇게나 돌돌 말려있으니 ‘너라도 힘껏 펴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시원히 막아주었으면-’하는, 자그만 대리만족을 얻고 싶었으리라. 일과를 마치고 난 후 맞이한 비는 생각보다 더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작고 얇은 천의 우산을 챙겨버린 탓에 비는 우산을 뚫고 정수리를 적셨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보며 집까지 걷는 그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예기치 않은 날에 평소에는 싫어했을 비가 좋아지게 된 이 순간이 조금은 천천히 가주길 바랐다. 발걸음에 맞추어 시간도 질질 끈 탓에 집에 도착하니 우산을 꼭 쥐고 있었던 손이 물을 흠뻑 먹어 쭈글쭈글해졌다. 따뜻한 물에 정신없이 씻은 후 침대에 누워 크게 숨을 쉬어본다. 여전히 세차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니 문득,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을 갔던 바람 따뜻했던 그 날을 떠오르게 했다.




대중교통이 편치 못한 길을 확인하고는 택시를 타겠다 다짐하고 아침 일찍 미술관으로 나섰다. 먼 길을 달려 도착한 미술관은 생각보다 장엄했고 본관으로 향하는 길목 중 깔려있는 현무암 자갈이 서걱서걱 밟혔다. 아침 일찍 방문한 덕분인지 그 소리가 온전히 들릴만큼 방문객이 적었다. 티켓을 끊고 첫 번째 전시관에 들어서니 간이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가 짧은 목례를 해주셨다. 답 목례를 마치고 고개를 드니 눈 앞에는 다양한 모양의 물방울들이 펼쳐졌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물방울만을 그려 온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보자니 마음 한 켠이 저릿해졌다.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라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가 곧 물방울 작업"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모양의 물방울을 담아낸 작품들 중 ‘회귀’라는 이름의 작품들은 천자문을 서예체로 켜켜이 쌓아 배경을 만들고 그 위에 물방울들이 맺혀있는 형태였다. 그 물방울들은 아름답게 그려진 한자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었고 인생의 희로애락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천자문 위에서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작품을 지나는 발길을 쉬이 뗄 수 없었다. 제주도에 오기 전 작은 쪽지에 적어 둔 김창열 화백 인터뷰의 한 구절이 마치 그가 옆에서 읊조리듯 귀 언저리를 간지럽혀서일까. 지나온 감정들을 붓 삼아 그렸던, 이내 헤져버린 마음의 캔버스에도 물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을 마음에 소중히 담아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전시관을 나왔다.




아마도 정수리에 똑똑 떨어졌던, 나 대신 흠뻑 울어주었던 비는 그 캔버스에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 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잠에 들 나의 마음에 알알이 맺힐 빗방울을 옆에 두려 살짝 창문을 열어두었다. 창가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그 날 따라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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