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에 발이 빠질까 달빛에 기대어 조심조심 걸었다. 자박자박 땅을 밟는 우리의 발소리가 시원한 밤바람 사이로 들려왔다. 걷는 걸음에 맞추어 종아리에는 진흙이 척척 달라붙었다. 논을 가로지르는 내내 귀뚜라미들은 밤을 맞이하며 큰 소리로 울어댔다. 앞에 걷던 친구는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서 껄껄 웃어댔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묻혀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친구의 웃음소리에 그저 따라 웃었다. 우리의 밤이 즐거워서 함께 웃어버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눈에 와 박혔다. 그 날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억에 ‘그리움’을 더하면 추억이라는 단어로 새로이 눈을 뜬다. 그리고 그 추억들은 이따금 일상 속에 찾아와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로 데려다 놓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그 여름밤도 그랬다. 가로등이 팟-하고 모두 꺼져버린 어두컴컴한 귀갓길 하늘의 별들은 논두렁을 건너며 하염없이 즐거워했던 그 여름밤을, 잊은 줄 알았던 그 날의 밤을 기억하게 했다. 그 여름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건, 미래의 내가 마주할 밤들에 그 날을 그리워하며 심심찮은 위로를 건네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추억이 건네는 위로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 눈물을 꾹 참아볼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하고 무미건조했던 하루에 옅은 미소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도 나는 추억을 만든다. 문득 찾아올 추억들 속 찬란히 빛나는 나의 모습을 미래의 내가 한껏 안아줄 모습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