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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Sep 14. 2020

너의 다가올 부재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늘에 닿을 만큼 웅장한 이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주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주쳤을까.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백 번은 오고 갔을 그 길에는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봄이 되면 거대한 줄기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하고 여름이 되면 울울창창하며 가을이 되면 거대한 잎을 거리에 뚝뚝 떨어뜨리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줄기로 가로등 불빛과 조화를 이루며 기하학적인 그림자를 만든다. 나무는 이따금 나에게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마다 자주 그 시선에 보답했다. 묵직한 몸으로 걷는 출근길에 푸릇한 잎이 조화로운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눈이 한차례 여유를 가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어스름해진 저녁에는 손톱 달이 나의 발걸음에 맞추어 잎사귀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며 숨바꼭질을 했다.


나의 위로의 순간에는 그 나무들이 있었다.



가로수 제거 및 식재 예정 안내
비대 성장과 수간 부후로 강풍에 의한 전도사고 및 특고압선, 변압기 저촉에 의한 전기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본 가로수는 제거하고 이팝나무로 식재 예정입니다.


다를 것 없던 퇴근길, 걸음을 멈추어 서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무에 붙어있는 문구를 찬찬히 읽었다. 외마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이 나무들이 너무 커버린 나머지 베어진단다. 울컥했다. 처음으로 마주한 나무의 살결은 노인의 주름살 가득한 피부처럼 자글자글했고 거칠었다. 지나온 시간을 감출 수 없음은 그 어떤 것이나 똑같다. 거친 나뭇결을 쓰다듬으며 올려다보니 나를 위로하는 듯 바람에 잎을 살랑이고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모든 이별은 존재의 영원함을 당연시했었던 과거의 후회와 부재로 인해 다가올 슬픔을 막을 길이 없다. 대상에 내 시선이 향했던 순간을 곱씹으며 마지못해 웃는 수밖에. 


성수역 3번 출구가 보이기 시작하면 건물들 사이 높다란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가장 먼저 반겨주곤 했다. 그 날은 나무 대신 낮게 잘려버린 나무 기둥이 나이테를 훤히 드러낸 채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비가 많이 왔었던 최근 날씨 때문인지 잘린 단면은 검붉은색을 띄었다. 물을 많이도 머금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잘린 나무 기둥 옆에는 심어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이팝나무 묘목이 휘청거리며 서 있었다. 새롭게 자리한 나무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그 어린 나무가 벌써부터 흰 꽃을 몇 개 펴놓았다. 내년에는 활짝 펴보겠다는 나름의 의지 어린 움직임이었다. 내년엔 내 키만큼 커진 이팝나무가 출근길의 시작을 알리겠지. 다가올 날의 그 꽃들을 이미 봐버린 것 같다. 


마중 나왔던 그 나무가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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