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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Mar 28. 2021

나와 당신이 닿는 순간

출근길에 지나가는 4성급 호텔 1층에는 카페 겸 편집 매장이 있고 그 앞에는 야외테이블을 위한 데크가 있다. 시간에 맞추어 걷다 보면 아침 8시쯤 그 앞을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마주치는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지나칠 때마다 항상 작은 걸레를 들고 그 데크 위 낮은 벤치들을 닦고 있다. 가끔 할머니는 작은 걸레를 한 손에 쥐고 문이 굳게 닫힌 매장 앞에 서서 쇼윈도에 진열된 모자들과 잡동사니들을 보고 계시기도 한다. 출근하느라 바쁘고 날카롭게 걷는 나의 속도와는 다르게 그녀의 시선은 아주 느리고 연하다. 출근시간에 빠듯하게 나오는 어느 날, 할머니는 모든 청소를 끝내셨는지 카페에서 준 따뜻한 커피를 들고 앉아계셨다. 벤치 한 켠에는 청소를 끝낸 까만 걸레가 놓여 있었고 한 손에 온 몸을 기댄 채 먼 곳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손에 기댄 할머니는 작지만 무거워 보였다. 


하얀 얼굴에 곱게 내려앉은 주름, 6:4로 깔끔히 정돈된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의 머리, 추워도 따뜻해져도 항상 입고 다니시는 꽃무늬 조끼. 할머니를 자주 만날수록 기억하게 되는 할머니의 모습들이 선명해졌다. 묵묵히 같은 시간에 카페 앞 데크를 청소하는 할머니는 내가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무렵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첫 번째 사람이다. 한 번도 말을 걸어본 적도, 서로의 시선이 닿아본 적은 없으나 느릿느릿하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행하는 할머니를 보면 힘 없이 출근하려던 나의 발걸음도 달리 걷게 된다.



20대 후반 언저리쯤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그 남자는 30대 초반이었고 나와 다를 바 없는 직장인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가벼운 호구조사를 한 뒤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왜, 방금 지나오면서 폐지 줍는 할아버지 봤죠? 저는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다 현재만 생각하고 살다가 저렇게 된 거예요. 저는 미래를 위해 이런저런 투자들도 하고, 지금의 일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야 잘 살 수 있으니까.”


순간 시선을 둘 곳 없는 나는 애꿎은 빨대만 연신 컵에 담갔다 뺐다를 반복했다. 들썩이는 엉덩이를 어렵사리 의자에 붙여놓고 30분 정도 치대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왔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느라 굽어버린 할아버지의 등을 보기보다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할아버지의 과거를 가벼운 입으로 부정해버리는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만이 짊어질 수 있고 살아가야 할 이유들 속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과거의 수많은 순간 속에서 젊은 날의 할아버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고, 혹여 후회를 한다면 그것도 그의 몫이다. 대신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에 ‘각자의 인생’이란 게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앉아 그의 말을 곱씹으며 받았던 충격을 되짚어보던 중 잘 들어갔냐는 연락이 왔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형식적인 말투로 답했다. 그에게 애프터 신청이 없는 게 이토록 다행일 수 없었다.




고운 얼굴의 할머니를 보면 젊었을 때 얼마나 예쁘셨을지, 꽃무늬 조끼가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옷은 얼마나 잘 차려입으셨을지 나름의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할머니의 어여쁜 청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르게 흘렀을 테지. 그리고 다가올 노년의 날들은 허리를 더 굽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연이 지나왔을 그녀의 과거를 궁금해하기보다 따뜻해진 봄 날씨 덕에 손이 좀 덜 시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할머니를 바라본다. 하루를 빠르게 시작한 할머니 일과의 마지막과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나의 일과의 시작이 닿는 찰나에 작은 바람 같은 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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