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발급기 앞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학창 시절로 떠나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밤에 자다가 잠깐 깼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숨이 잘 안 쉬어지면서 심장이 조여왔다.
'집 밖에 나가서 좀 걷거나 달리면 괜찮아질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적 드문 주택가였고,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 중에 자다가 옆에 내가 없으면 이 방 저 방 찾으러 다니는 어린 아들을 생각하니 집 안에서 이 상태를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잠재워보고자 하였다.
따뜻한 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오한이 느껴져서 미니 전기장판을 꼭 끌어안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구토할 거 같고, 어지럽고, 질식할 거 같아서 서있기도 괴롭고, 누워있기도 괴로워 짐승처럼 방바닥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다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증상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 와중에 곤히 자고 있는 어린 아들이 걱정되었다.
만약 아들이 깨어있는 시간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아이를 도저히 케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 6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깨어있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그냥 이대로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위급 상황이 아닌대도 불구하고 나의 뇌가 위급 상황이라고 오류 신호를 보내는 공. 황. 발. 작.이었다.
공황 발작 이 전에도 여러 전조 증상들이 있었지만 발작 이후에 극심한 무기력증과 깊은 우울감 그리고 전신 통증과 계속되는 몸살, 미열, 불면, 복통, 치통, 이명, 식욕 감퇴 등이 줄줄이 따라왔다.
특히 불안과 긴장 그리고 짜증과 분노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고, '어디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둠의 소용돌이 속으로 끝도 없이 빠져드는 지옥을 맛보았다.
집순이라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공황 발작이 오고 나서는 집에 있는 것이 턱턱 숨이 막히고, 숨통이 꽉꽉 조여와서 집 밖을 뛰쳐나가거나 지붕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상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였다.
내 몸도, 내 정신도 어느 하나 컨트롤 되지 않았다.
좀비가 된 거 같아 너무나도 끔찍하고 무섭게 느껴졌고, 그런 상태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계속되었다.
나는 함몰되지 않기 위해 심리 상담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받았고, 불안, 긴장,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는 약과 영양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또 집 안에 혼자 고립되어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가서 자꾸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면서 끔찍한 상태에서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지금도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연찮게 새로운 목표가 하나 생겼다.
최근 행정복지센터 무인 발급기에 어떤 서류를 발급받으러 갔다가 화면 속에 '생활기록부'와 '성적증명서'라는 글자가 그날따라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날 무인 발급기 앞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학창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어릴 적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서 리포터가 사연자나 추억 속 주인공의 생활기록부와 성적표를 공개하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서류가 인쇄되어 나오는 기계음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필자의 경우 초등학교 시절은 무인발급기로는 발급이 불가했다.)
나는 서류를 훑어 내리며 중학생 시절로 돌아갔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중학교 시절
요령이란 것을 피우지 않고, 뭐가 되었든지 열심히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영화와 여행을 좋아해서 연기자나 여행가이드가 되고 싶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연극 동아리 면접을 봤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연기는 로봇이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 연극 동아리에서 시원하게 떨어졌고, 대신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서 영화를 실컷 봤다. 교실에서 영화감상은 입시 전쟁터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대학은 중고등학교 때 진로 희망 사항 중 하나였던 여행 가이드가 되고자 관광경영학과에 진학했는데 졸업할 쯤에는 관광보다는 마케팅이나 경영 쪽에 관심이 생겨서 진로를 또 바꾸었다.
아래 표와 같이 중학교 때 나의 이런 진로 희망과는 달리 부모님께서는 교사나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셔서 중학교 3학년 때는 양심상 초등 교사라고 적어는 냈지만 사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연기자나 여행가이드가 안되면 동물원 사육사나 아프리카 야생 동물 구호가나 해양 탐사원이 되고 싶었다.
내가 지금 동상이몽 아들을 키우고 있듯, 어린 시절 나 역시도 부모님께 동상이몽 딸이었다.
나는 학교라는 곳을 빨리 졸업하고 싶었고, 돈도 빨리 벌고 싶었고, 일도 빨리하고 싶었고, 해외에도 빨리 나가고 싶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보니 '자유로운 삶'과는 더욱더 멀어졌고, 삶의 무게와 부부로서, 며느리로서,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래 표를 보면 중학교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나를 '모범', '성실', '차분', '열심', '착한', '최선', '봉사'라는 단어로 정의해 놓으셨는데
나의 이러한 성향이 고등학교에 가서 직업 적성 검사를 해보니 추천 직업으로 '사회복지사'가 나왔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사회복지사로 진로를 결정하려고 2년간 마음을 먹었다가 아래 표를 보면 고3이 돼서 여행가이드로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봉사'도 좋지만 '여행'의 승리였다.
(요리사도 되고 싶었지만 요리 잘하는 남편을 만나서 요리에 대한 갈증이 간접적으로 채워지니 현재로서는 요리사에 대한 꿈은 접은 상태이다.)
아래 생활기록부를 보면 고등학교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나를 '유머 있는', '명랑 쾌활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노력형인', '자기주장이 명확한', '매우 밝은', '매사에 충실한', '적극적인', '믿음을 주는', '모범적인' 학생으로 정의해 놓으셨다.
최근의 내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어서 읽으면서 서글펐다.
대학생 시절은 부모님께서 아르바이트보다는 장학금을 받길 원하셔서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자 애를 썼다. 그래서인지 4년 동안 8번의 학기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졸업 전에 과에서 석차 1등을 해서 장학금을 전액으로 한 번은 받아보고 졸업하자는 목표를 세워서 3학년 2학기에 그 목표를 달성했다. 2등, 3등도 힘들지만 1등은 정말 많은 것을 갈아 넣어야 했다.
그래서 이 또한 두 번은 못할 거 같고 한 번 해본 것에 만족한다.
마지막 학기에 교수님께서 대학원에 진학해서 조교나 연구원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는데 그냥 빨리 졸업해서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공황 발작이 온 시기에 우연히 나의 학창 시절 기록을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를 되찾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그래서 진로 희망에서 이루지 못한 '사회복지'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아이에게 발달 장애가 있어서 택한 이유도 있다.
어찌 되었든 9월부터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살림과 육아를 하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혹은 일요일에도 아이를 발달 수업에 데리고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몇 년 동안 강의를 듣고, 과제와 리포트를 제출하고, 시험을 치고, 160시간의 실습을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엄두가 안 난다.
결혼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몰랐기에 결혼을 할 수가 있었고,
임신과 출산이 뭔지 잘 몰랐기에 아이를 가지고 낳을 수가 있었고,
육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몰랐기에 아이를 키울 수가 있었다.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그러면서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겠냐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잘 몰랐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이번에 또 사고를 쳤다.
자세히 알면 못 할 거 같으니까 잘 모를 때 도전한다.
나의 예감상 오랫동안 공부라는 것을 쳐다도 보지 않았기에 사회복지학과 편입이 '끝'이 아닌 '시작점'이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