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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아픈 기억에 대처하는 자세

'이제서라도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by 오뚝

아들이 일반 어린이 집에서 병설 초등학교 특수반으로 옮긴 지 5개월째에 접어들었다.


5세 때 어린이집 등원 거부가 심했던 아들은 빨리 데리러 오라고 울먹거리는 날이 많아서 집에 가는 척하고 잘 들어갔나 숨어서 지켜보면 어린이 집 현관문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서 신발을 벗지 않고, 선생님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앉아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었다.


'어린이 집 가는 게 그렇게나 싫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이가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 게되었다.

아이는 6세 때 유치원으로 옮기고 나서부터 등원 거부도 없어지고, 웃음과 활기, 그리고 안정감을 많이 회복했다.


정말이지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 집에서의 아픈 기억이 아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옆에 와서 이런 말들을 종종 했다.


"어린이 집 다닐 때 내가 선생님 말을 안 들어서 어린이 집 선생님이 내 볼을 세게 꼬집었어.

너무 아팠어. 아파서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계속 꼬집었어."


"선생님이 내가 말을 안 듣는다고 내 숟가락이랑 포크를 복도에 던졌어. 그래서 복도에 서서 울었어."


아이가 새로운 유치원을 좋아하고, 잘 다니고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이 입장에서는 그때와 지금이 비교가 돼서 오히려 예전 생각이 더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퍼거 아동의 경우 전형적인 자폐스펙트럼과 달리 언어와 지능에는 별로 문제가 없거나, 일반 아동들보다 언어(발달 검사상 점수는 높게 나오지만 실제 화용 언어는 취약한 경우가 많다.)와 지능이 더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지시 수행'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보인다.

그렇다 보니 다 알고 있으면서, 다 알아들으면서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 '말을 안 듣는 아이'로 오해를 받기가 쉽고, 설사 부모와 교사들이 아동이 장애로 인해 지시 수행에 어려움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아동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일은 많은 인내심과 긴 시간 그리고 될 때까지 무한 반복을 필요로 하기에 '지시 수행'은 기관과 가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면서 아스퍼거 아동의 큰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아들의 경우도 아스퍼거 장애가 있다 보니 낮은 청지각력, 주의력, 실행 기능 등으로 인해서 지시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예를 들어 지시 자체를 잘못 이해하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행동을 하거나 새로운 지시가 추가될 경우 우왕좌왕하거나 버벅거리거나 실수가 잦거나 지시를 수행하는 속도가 매우 느리거나 때에 따라 거부, 회피, 무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또 한꺼번에 여러 단계의 지시를 할 경우 중간에 지시 사항을 잊어버리거나, 주의력이 낮아 다른 곳에 시선과 관심을 잘 빼앗기다 보니 지시 수행 중에 다른 곳으로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우선순위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단력과 실행 기능이 약하다 보니 지시를 끝까지 따르지 못하는 경우 또한 많다.(아스퍼거 장애는 adhd가 동반될 확률이 높은데 adhd가 함께 있는 경우 지시 수행이 더욱 어려워진다.)


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고, 가지고 있는 언어 능력에 비해 설명을못하다 보니(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순서에 맞게,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이야기하는 것) 질문을 하면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이야기 주제를 갑자기 다른 주제로 바꿔버리거나, 무응답 또는 기계적으로 답하거나 건성으로 대답하는 거처럼 보일 때가 더러 있다.


나 역시 위와 같은 이유로 '뚜껑'이 열리고 '환장'할 때가 있지만 5세였던 아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는 이유로 기관에서 그런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아팠다.


아이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닌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짜증 나고... 밉고... 손이 많이 가서... 그래서 그러셨던 거 같다.


선생님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스퍼거 장애에 대해 잘 모르는 선생님이었으니까....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해 보지만... 그러한 일을 여러 차례 겪었을 아들을 생각하면 부모로서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의 사건들을 잊지 못하고, 종종 얘기를 꺼내는 것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우선은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그 선생님을 만난다면 어떤 말이 가장 듣고 싶니?"


" 미안해. 사과를 받고 싶어요."


그래서 나와 신랑은 아이가 글을 읽을 줄 알고, 카카오 톡을 아니까 어린이 집 키즈 노트에 있던 선생님 얼굴 사진을 가지고 와서 카카오톡으로 선생님이 아이에게 사과하는 내용의 글을 작성해서 보여주었다.


실제로 사과를 받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 선생님은 다른 지역의 어린이 집으로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사진과 글로나마 사과를 전하면 아이 마음에 난 상처가 지금보다는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들은 자기가 안 소중한 사람이라서 선생님이 자기한테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말해주었다.


"넌 소중한 아이야. 000 선생님이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신 거 같아. 사람은 말이야. 말을 잘 들으면 소중한 사람이고, 말을 잘 안 들으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다 소중해. 그런데 그 어린이 집 선생님은 어른이지만 그런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행동하셨나 봐."


아이에게 보여준 카카오톡 사과문과 소중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는 그 사건들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인데, 00 선생님이 내가 말을 안 듣는다고 내가 안 소중하다고 잘못 생각해서 그렇게 하셨어."

우리 부부는 아이가 하는 말을 통해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사건이 불거지고야 말았다.


그날도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엄마, 내가 어린이집 선생님 말을 안 들어서 선생님이 밥을 잘 안 챙겨줘서 내가 얼마나 배고팠는지 알아? 그래서 집에 와서 밥 많이 먹은 거야."


'아니.. 아들아... 그건 또 무슨 소리니.... 3탄도 있는 거였어?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랬구나... 네가 그 당시에 어린이집 가기를 유독 힘들어했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는 이렇게 표현도 못하고, 설명도 못하던 때라서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니...'


3탄 얘기를 새롭게 커밍아웃한 아들에게 나는 말했다.


"아들아 고마워. 힘들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엄마에게 이야기해 주니까 정말 고마워.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한테 얘기해 주면 너무 고마울 거 같아. 넌 소중한 사람이야. 사랑해. 우리 아들."


'왜 이제야'가 아닌, '이제서라도' 너의 마음을, 너의 아픔을 얘기해 줘서 고마워.


"아이가 나에게 한 말이 백 프로 사실이 아닌 인지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이가 기억하는 4세, 5세, 6세 때 기억 속에 5세 때 어린이 집 담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4세, 6세 때와 비교했을 때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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