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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로윈 Jan 06. 2020

여행과 날씨요정

맑았던 체스키크룸노프(좌) 와 흐렸던 에든버러(우)

해외 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쯤 전부터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것이 바로 일기예보이다. 사진을 많이 찍는 나의 여행에서는, 날씨가 여행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낮에는 날씨가 맑아야 사진이 잘 나온다는 나의 지론이 있다. 사진가 분들을 보면 날씨와 무관하게 멋진 사진을 찍으시지만, 사진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나는 흐린 낮에 좀처럼 예쁜 사진을 건지기 힘들다.


그래서 '날씨요정'이라는 말도 있나보다. 일 년 내내 날씨가 흐리고 언제 비가 올 지 모른다는 영국이라도, 그 사람이 가면 거짓말처럼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끼고, 미세먼지 가득한 봄에도 그 사람이 벚꽃 사진을 찍으러 한강공원으로 나가면 먼지가 걷히는 그런 사람을 날씨요정이라 부른다. (또는 그런 때 날씨요정이 찾아왔다고 한다.) 나의 여행은 날씨가 좋은 적도 많았지만 반대로 날씨 운이 따르지 않았던 적도 많았기에, 나는 아마 날씨요정은 아닐 것이다.




날씨요정에게 미움을 받으면 여행을 간 기간 동안만 야속하게 궂은 날씨가 찾아온다. 기억에 남을 만큼 날씨에 간절했던 적을 생각해보면, 2년 전 봄 파리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꽃피는 봄 파리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 5일 동안 파리에 머물기로 하고, 소위 '1일 1에펠', 즉 하루에 한 번씩 꼭 에펠탑을 보기로 마음먹었던 여행이었다. 여행 첫 날은 야속하게도 차가운 비만 주구장창 내렸다. 에펠탑이 가시거리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고, 밤이 되어 에펠탑 조명이 밝혀져야 겨우 파리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멸망할 것 같았던 파리의 날씨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흐리거나 비가 오는 파리도 낭만적이기만 하던데, 왜 내 사진의 파리는 곧 멸망할 것처럼 나오던지. 날씨가 참 야속했다. 


다음 날은 비가 그쳤지만 여전히 흐렸고, 친구와 에펠탑을 보기 가장 좋다는 사이요 궁(Palais de Chaillot)으로 갔지만, 아무리 사진을 찍어 봐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뿐이었다. 희뿌연 하늘 속에 나와 에펠탑만 있으니 무슨 합성 사진 같이 시원찮았다. 친구와 내일 한 번 더 이곳으로 오기로 약속했다. 나와 달리 다음 날 다른 여행지로 떠나야 해서 그 날이 마지막 기회였던 친구의 표정에는 근심이 한 가득이었다.





대망의 셋째 날, 드디어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친 뒤 먼지 한 톨 없는 맑은 날씨가 찾아왔다. 나와 친구는 들뜬 마음을 안고 에펠탑 앞에서 오전 내내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에펠탑, 너 이렇게 아름다운 녀석이었구나. 일어서서 한 장, 앉아서 한 장, 점프해서 한 장, 혼자서 한 장, 둘이서 한 장, 심지어 근처에서 산책하던 강아지와도 한 장.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댔다. 날씨 요정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고 싶을 정도로 맑은 날씨가 고마웠던 하루였다.


신이 나서 사진을 미친 듯이 찍었던 하루


날씨 요정의 가호를 받은 날도 있었던 반면, 날씨요정의 저주(?)를 받은 날도 있었다. 베트남 사파를 여행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인스타그램에서 아름다운 숙소의 뷰를 찍은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에코 팜 하우스(Eco Palms House)'라는 이 숙소는 사파 시내에서도 택시를 타고 30분 넘게 산길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날씨가 맑을 때면 사파 지역의 계단식 논과 자연을 숙소 창문 밖으로 조망할 수 있는 뷰로 유명했다.


나도 꼭 '그 사진'을 찍고 말겠노라, 는 생각으로 여행하기 몇 주 전부터 사파의 날씨를 하루에도 몇 번씩 검색했다. 사파는 고산지대라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고 했다. 일기예보에는 흐리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를 버리고 도착한 사파의 아침, 나와 일행은 숙소에 체크인하기 전 소수민족 마을인 깟깟마을(Cat Cat Village)을 방문했다. 아침에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고 햇빛이 나자 나는 '날씨요정이 나에게도 찾아왔구나!'라고 생각하며 숙소로 가서 멋진 사진을 찍을 생각에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이때가지만 해도 날씨가 (우리들 표정만큼이나) 맑았다.


그런데 웬걸, 체크인 시간에 맞춰 오후 한 시에 숙소에 도착하니 갑자기 거짓말처럼 세상이 안개로 뒤덮였다. 고산지대라지만 날씨가 이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것은 반칙 아닌가. 날씨요정의 가호를 받았다고 기뻐하던 나의 오만함에 벌을 내린 건지, 두터운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파에서 건진 사진은 숙소에 있던 예쁜 빈 백과 테이블 그리고 뿌연 안개로 뒤덮인 바깥 풍경 그뿐이었다.


안개로 뒤덮인 사파의 풍경




그렇지만 사파 여행은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좋았던 기억 중 하나이다. 그것은 아마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만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에코 팜 하우스는 멋진 뷰 뿐만 아니라, 친절한 직원과 손님을 격하게 반기는 강아지와 고양이들, 그리고 어떤 메뉴를 시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게다가 사파 여행은 언제 어디서든 모이기만 하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에코 팜 하우스에서 우리는 오후 세 시쯤 설렁설렁 로비에 나와서 한 시간 간격으로 음식을 시키며 술을 마시고 밤까지 떠들었다. 그게 그렇게 행복했다.


에코 팜 하우스의 맛있는 음식과 사람을 많이 따르던 고양이




특별할 것이 없지만 가장 특별한 추억이 된 사파여행은, 여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진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해 주었다. 날씨 운이 없는 나지만 인복은 참 많다고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날씨요정은 절대 될 수 없겠지만, '사람요정'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날씨요정님의 방문은 항상 환영합니다. 자주 와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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