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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Mar 08. 2021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밤

그것도 아주 큰 일이.

잔잔한 바람 소리가 자아낸 일렁임이 쉽사리 잦아들지 않는 밤이 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고, 입술은 자꾸만 타들어 가는 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야 할 것 같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밤. 

한동안 뒤척이다, 고요한 일렁임을 커다란 해일로 뒤덮고야 마는 밤.


그날 밤이 그랬다. 별다를 것 없는 평일 새벽이었는데, 그냥 새벽의 공기가 분위기가 그랬다.




몇 시간째 껌뻑이던 눈은 조금씩 시어 오다 결국에는 축축이 젖어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눈이 조금 말랐을 뿐이라고, 조금 기다리면 멎을 거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눈물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눈물을 훔친 채, SNS 접속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의 사진이 내 주변을 조용히 스쳐 지났다. 허공으로 올려보낸 피드가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가슴 한편에열등감이, 다른 한편에 쓸함이 차올랐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사슬에 꽁꽁 묶여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밤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매번 같아서 더욱 알알한 밤이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괜찮아 보여야만 했다.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는 시답잖은 위로가 싫었고, 그 위로가 전적으로 사실이라는 점이 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사람들의 눈빛이 버거웠다. 나를 향한 모든 시선이 동정으로 비치는 것만 같아서 버거웠다. 차라리 모두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위로를 받기 싫었던 건 아니었는데, 위로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평생 혼자가 되기로 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같이 하는 삶의 설렘보다는 헤어질 때 아픔이 항상 더 컸다. 얼마간 웃다가 오랫동안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데일 듯한 열기에 달아올랐다가 서늘하게 식어버리기를 반복.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만 있으면 중간은 갈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무용하게 느껴지는 요즘처럼,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체온으로 살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밀려오는 일렁임을 나로서는 하릴없다. 자못 커다랗게 밀려오는 해일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산한 새벽의 바람을 나 홀로 견뎌내지 않을 수가 없다. 혼자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 평생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짤막한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도 잔잔한 바람이 불어온다. 성긴 옷섶을 헤치고 가슴께까지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미지근한 바람에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댄다. 시간이 흐를수록, 밤이 깊어질수록 떨림이 조금씩 잦아든다. 마침내 꽁꽁 얼어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뜨거운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여름에 흐르는 땀과도 같은 눈물이다. 바람이 조금만 더 세게 불어오면 나는 '쟁그랑'깨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바람은 그 이상으로 부는 일이 없다. 적당히 버거운 만큼만, 딱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불어올 뿐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침을 기다린다. 해가 뜬다. 그리고 잠이 든다.




며칠 후 나는 거울을 보다 커다란 상처를 발견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처는 아니다. 심연 맨 밑바닥에 새겨져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깊고 커다란 상처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인지 거울 앞에서 그 상처를 마주한다. 거울에 비친 내 화상이 조금씩 조금씩 흔들린다. 가슴께가 알알하다 못해 많이 쓰리다.




마침내 나는 진회색 감정이 남기고 간 골짜기 맨 위에 서 있다.

나는 움푹 파인 골짜기 하나하나를 온몸으로 느끼며, 천히 눈을 감는다.




억겁의 시간 동안 숨죽이며 있던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기억의 끝이 머무는 평원을 찾는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들판은 없다.

아득히 먼 곳까지 움푹 파인 흔적이 남아있다.

골짜기의 폭이 어지간히 넓은 것을 보면,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났던 모양이다. 분명 아주 큰 일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기어코 기억이 한 우주의 끝까지 생채기를 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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