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shoes Jun 16. 2024

베토벤에 도전해보다(?)

쌩초보의 피아노 연습

바쁨이 막판 피치를 올리고 있어서 피아노 연습은 답보상태지만, 짬짬이 음악은 많이 듣는다. 스트레스가 쌓여갈 때 음악은 해독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음악은 가장 접근하기 쉬운 취미이기도 하다. 물론 공연장에서 듣는 것이 더 좋지만, 어딘가에 가지 않으면 아예 시작조차 못하는 취미도 많으니까 거기에 비하면 너무 간단하다. 재생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누워있으면 되니 체력도 필요없다. 더구나 피아노곡들은 녹음과 현장의 격차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집회에 참여하듯이’ 감상할 필요가 있는 교향곡이나 녹음시 배음의 일부가 날라가는 듯한 바이올린 곡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요즘 쇼팽을 넘어 브람스, 라벨, 베토벤 등등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듣는다. 특히 베토벤을 많이 듣는다. 얼마 전에 타개하신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에서 하나 하나씩 들어본다. 이 앨범을 들어보면 폴리니를 쇼팽 전문가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까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쇼팽은 바흐처럼 바흐는 쇼팽처럼 쳐야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다이내믹의 기복이 심하고 리듬이 불규칙한 베토벤 곡들을 폴리니는 지극히 절제된 해석으로 연주하여 뛰어난 균형감각을 들려준다.


옛날에는 베토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장대하고 엄숙해서 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든 덕분인지 몰라도 요즘은 베토벤만큼 음악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그 무한한 깊이를 보여준 작곡가가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들은 전형적인 ‘영웅적 시기’의 곡들이기에 나도 주로 그런 곡들만 알고 있었고 베토벤의 다양한 면모들을 몰랐던 것도 있다. 요즘 새롭게 발견한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은 이런 곡도 있나 하고 놀랄 만큼 ‘전형적인’ 베토벤 스타일이 아니다.


이 후기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아도르노의 글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도르노가 ‘만년 양식’이라고 부른 이 최후의 소나타들은 뜻밖에 한없이 가볍고 누군가의 표현처럼 ‘허공을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모차르트처럼 천진난만한 가벼움이 아니라 전통적인 음악의 구조를 다 해체한 끝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가벼움이다. 역설적인 것은 중력을 초월한 것 같은 이 가벼움이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구조에 의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악보를 봐도 인간의 힘으로(?) 연주가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난해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no.32의 시작과 끝. ‘아주 느리게 단순하고 노래하듯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주 느리지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고 노래하듯이 칠 수도 없는 곡이다.


그 절정에 달한 곡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no.32이다. 특이하게도 단 두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소나타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2악장이다(물론 하나의 소나타는 하나의 전체이기에 전 악장을 한꺼번에 듣는 것이 최적의 감상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매번 그럴 것까진 없으니까). 아리에타(Arietta : 작은 아리아)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이 2악장은 몽환적인 선율로 시작해서 현대 재즈를 방불케 하는 리드미컬한 흔들림을 지나 마침내 더 이상 음악이 아니라 음들의 진동 혹은 경련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후반부에 이른다. 음들은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며 아도르노의 표현처럼 ‘고별’을 알린다.


아도르노의 <베토벤 : 음악의 철학>에 나오는 피아노 소나타 32번에 대한 구절. 번역이 살짝 이상한 것 같긴 한데..


토마스 만은 아도르노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파우스트 박사>에서 이 2악장을 “소나타에 대한 작별”이라고 불렀다(이 소설은 초반의 늘어지는 전개가 지루해서 아직 완독할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이 소나타가 언급되는 부분은 읽었다. 여담이지만 토마스 만은 세련된 주제의식에 비해서 솔직히 글을 잘 쓰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32번을 포함해서 베토벤 후기 소나타들은 내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난해한 곡이지만, 애초에 피아노 연습을 하게 된 것도 좋아하는 곡을 치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닌가. 내 수준에서는 전체를 칠 수는 없다고 해도(그리고 내 손가락 길이로는 물리적으로도 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약간 맛보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어제 아리에타 악장의 초반부를 오른손으로만 잠시 쳐봤다. 그런데 오오! 된다 된다! 이 감격. 물론 말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내가 들었던 그 음들을 내가 재연해낼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악보를 보고 크게 버벅대지 않고 바로 칠 수 있게 된 것도 큰 발전이다.


단순함과 복잡함이 아이러니하게도 한꺼번에 들어있는 이 소나타의 특이함은 조성에서도 드러난다. 이 곡은 검은 건반을 칠 필요가 없는 다장조이다. 너무나 기초적인 이 조성의 원칙을 베토벤은 끝까지 그대로 지킨다. 어디까지나 으뜸화음은 으뜸화음으로 곡의 중심을 차지하며, 후반부에 가서는 더 그렇다. 불협화음을 많이 사용한다던가 높낮이의 진행을 급격하게 한다던가 요컨대 낭만주의 음악이 갔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나오는 효과는 고전주의 음악의 전형과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흔히 이야기하듯이 베토벤이 낭만주의의 선구자였던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를 뛰어넘었다고 말한다.


내 피아노 소리를 듣더니 T가 “뭔가 음악 같지가 않네”해서 그렇게 못친다는 말인가 하고 좌절했는데 전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려줬는데도 음악 같지 않다고 말해서 좀 위안이 되었다. ㅎㅎㅎ T는 정확하게 들은 것이었다. 이 곡은 음악 같지 않은 음악, 음악을 초월한 음악이다. 내가 과연 이 곡을 완전히 칠 수 있는 날이 올까?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곡들을 연습한 후 언젠가는 시도해보고 싶다.


폴리니도  곡만큼은  아닌  같아서(각자 해석방식이 다를  있지만, 내가     몽환적으로 쳐야   같은데 폴리니 연주는 너무 또랑또랑? 하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찾아봤다. 그러다 이거다! 하고 단박에 마음에 들었던 것이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으면서 공허하고 그런가 하면 또 숨겨진 에너지를 지닌  곡을 너무나  표현하는 연주다. 아쉽게도 유튜브에는 없는 .


대신(?) 예프게니 키신이 치는 영상을 링크해본다. 대신이라고 말하니 키신의 의문의 1패지만, 그만큼 리흐테르의 연주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이 곡만큼은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가 귀에 안 들어올 정도.


https://youtu.be/8AQ9hZTpgwM?si=3j8IZsD-aAKZB9uM​​



매거진의 이전글 연주도 육체적 운동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