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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Sep 01. 2024

음악이 춤의 가면이 될 때 : 베토벤 교향곡 7번

나의 플레이리스트

베토벤이 ‘격정’의 작곡가지만 그 격정은 어디까지나 중부유럽 혹은 북유럽적인 묵직함이나 어두움의 틀 속에 있는 것 아니겠냐는 나의 편협한 생각을 교향곡 7번은 깨뜨려준다. 이 교향곡은 많은 사람들이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던, 열에 들뜬 것 같은 광적인 에너지를 내뿜기 때문이다(베토벤 본인도 이 곡을 발표하면서 스스로를 바쿠스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던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속도는 빠르고 선율은 상승하고 리듬은 춤곡의 박자를 갖지만 결코 명랑쾌활하지는 않다. 이 역설적인 혼합체, 즉 우울하면서 들뜬 상태를 우리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니체가 말한 ‘도취’라는 단어 이외에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헌정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이 바그너보다 더 ’디오니소스적‘이다.


물론 니체나 쇼펜하우어가 음악을 도취, 광기, 충동, 의지 등등의 단어로 규정할 때,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음악이야말로 정교한 질서와 체계의 예술 아닌가? 그러나 작곡이 정교하다고 해서 그 곡의 연주나 노래가 도취적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겠지. 오히려 정교함은 도취의 재료가 되어 도취의 강도를 높일 수 있다. 베토벤 교향곡 7번이 그 생생한 사례이다. 가장 애조 띤 2악장조차도 최초의 모티프가 점차 변주되면서 눈덩어리처럼 에너지가 계속 축적된다. 일반적으로 교향곡 2악장이 아디지오인 데 비해, 이 악장은 알레그레토이다. 알레그레토이면서 A Minor이다. 여기서는 모든 악기가 예상치 못한 역할을 맡는다. 오보에가 짧게 악장의 시작을 알리면, 비올라의 아름답고 음울한 소리를 시작으로 현악기들의 저음 연주는 주선율과 베이스음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클라리넷과 플루트는 마치 타악기처럼 리듬을 반복한다. 2악장에서 축적된 힘은 3악장에서 점점 넓게 퍼지며 상승하다가 4악장에서 폭발한다. 트럼펫과 팀파니가 전면에 나서며 현악기들은 마치 심장박동처럼 빠르게 내달린다.


카랴안이 지휘하는 1986년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어보면, 현악기들의 소리가 광대한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계속 진동하고 그 움직이는 공간 속을 관악기들이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이 광대한 공간 속에 보이지 않는 춤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교향곡이 춤곡의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무용곡으로 쓰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안무가 이름은 기억을 못 하지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반라의 무용수가 이 곡 2악장에 맞춰 춤을 추는 공연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아 정말 너무 이상했다. 안무가가 해석을 잘못 한 걸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이 곡은 결코 춤곡이 될 수 없는 것 아닐까. 춤곡의 느낌을 주는 것과 실제로 춤곡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어쩌면 여기서 춤은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것 아닐는지. 때로는 부재함이 가장 강한 존재 방식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춤의 가면이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아니라, 얼굴 없음을 가리는 가면.


https://youtu.be/PKAyq5k4H8A?si=TX4Wk_G_xgw2J7Y7​​

소리가 너무 작게 녹음되었고 화질도 안좋지만 캬랴얀 지휘 - 베를린 필 연주 버전으로 이 곡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앗 근데 바로 플레이가 안되는구나. 링크를 타고가야 하는 듯.


7번 교향곡은 모든 악장이 교향곡 치고는 선율이 비교적 선명하고 같거나 비슷한 선율이 반복적으로 연주되기 때문에 기억에 잘난다. 특히 2악장의 선율은 한번 들으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현악기들이 길을 닦으면 관악기들이 같은 선율을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아마도 이런 특성 때문에 이 악장을 편곡한 사람들도 종종 나오는 것 같다. 리스트가 2악장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버전이 있다고 해서 들어봤는데 왓더.. 이상했다. 리스트의 작곡 실력까지 의심 갈 지경으로.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반복되는 선율 그 자체가 곡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 아닐까. 아름답고 거의 감상적인 이 선율은 어떤 의미에서 페이크인 것이다. 핵심은 악기들의 파격적인 사용에 의해 우리가 통상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음악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흐름 속에 녹아내면서 곡을 계속 전진시키는 오케스트레이션 그 자체이다. 그러니 선율만 따오는 건 곡을 죽여버리는 것 아닐지. 이건 라벨의 볼레로나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같은 곡에도 비슷하게 해당되는 문제다. 이 곡들의 경우도 선율은 페이크이기 때문이다.


반면 ‘팝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버전은 나름 괜찮았다. 괴테의 시를 가사로 붙였다는데 내용은 못알아듣겠지만 느낌은 있다. 편곡으로 구조가 단순화된 건 리스트 피아노곡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가사가 붙어서 입체적 국면이 생겼고 훌륭한 노래 실력이 곡에 볼륨을 만들어주기 때문인 것 같다. 합창을 넣은 것도 도움이 됐고(그리고 베토벤 자신도 괴테의 연극 에그몬트 서곡을 작곡했고 친분도 있었으니 괴테가 나오는 게 엉뚱하지 않다).


https://youtu.be/ZqSeYi_wSnU?si=MV-JeHBBFhlKOr0n


2악장 시작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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