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이런 말을 들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교실 청소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 나를 불러 세운 걔가 주먹을 꽉 쥔 손을 내밀며 말했다. 펼쳐진 손바닥 위에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두 개에 천 원에 파는 은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실내화 가방을 들고 있던 손으로 그 반지를 잡으려다 말고 나는 냅다 몸을 돌려 계단을 우당탕탕 내려가기 시작했고, 걔는 어디를 가냐고, 소리를 지르며 나를 쫓아왔다. 용기 있던 친구의 고백에 대한 나의 답은 예쓰도, 노(NO)도 아닌 런(도망)이었다. 걔가 싫은 건 아니었는데.. 생애최초고백을 이런 식이 아니라, 아주 아주 멋스럽게 받고 싶었던 사춘기 소녀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내 글이 좋다. 투박하고 멋대가리 없으며, 가끔은 아니 자주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는, 정신없는 와중에 조금 웃기기도 하는 게 내 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글이 못 생겼다고 생각했다. 알맹이는 하나 없고, 두서없는 글이라고.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브런치 작가에 승인이 되어 열심히 글을 쓰다가도 번번이 브런치 공모전에 떨어질 때마다, 나와 같은 소재의 글을 쓰지만 참신한 기획력으로 만들어진 글을 볼 때마다, 어쩜 글을 이리 잘 쓰세요?라고 물어보고 싶은 작가님을 만날 때마다 다시 한번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게 도망을 칠 때마다 나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경영학부를 나와서, 나이가 많아서, 체력이 없다는 이유로 꿈에서 달아났던 과거의 나를 만났다. 그동안 갓벽과도 같은 완벽을 바랐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결점 없고, 완벽한 것이 어디 있다고. 철없는 생각이었다.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단연 귤 때문이다. 생긴 것도 귀엽고, 손에 딱 쥐어지는 앙증맞은 크기도 그렇고, 까먹는 재미도 있는데 맛있기도 한 이 귤을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며 문득 내 글이 귤 같은 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목만 보고도 군침이 돌아서 얼른 까보고 싶은 글, 너무 장황하지 않아서 애쓰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글, 다 보고 나면 맛있는 글이네!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귤 같은 글 말이다.
구독자가 늘어날 때마다, 좋아요 알람이 올 때마다,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좋아하는 귤 10개를 한 번에 먹은 사람이 된 것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때로는 광야에 혼자 남겨진 사람이 된 것처럼 외로웠다. 반응이 왜 없지? 내 글이 별로인가? 역시 구렸어! 썩어버린 귤 같은 글! 손님들로 북적이는 과일가게에 입점 한 나의 귤이 어느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한 채 의기소침해하는 귤을 지켜봐야 하는 농부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흑흑.
한참을 그렇게 스스로를 벽으로 몰아세우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한 박스에 귤이 50개가 들어있다면, 그 50개가 전부 다 맛있을까? 아닌데..? 그중 몇 개는 심심한 맛이 날 거고, 몇 개는 새콤달콤한, 또 몇 개는 신맛이 났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50개 중에 두세 개 맛없는 귤을 먹었다고 다시는 귤을 안 먹을거란 생각을 했었나? 아니었다.
완벽한 글이란 게, 완벽한 일이란 게, 매번 완벽한 글을 쓰는 완벽한 인간이란 게 세상에 존재할까. 당도 100%! 신선 맛 보장!이라는 강박에 글을 미루는 짓은 이제 더는 안 하련다. 이제 도망은 그만 치고 맛 좋은 귤이나 많이 생성해내자고, 오늘부터 그냥 쓰는 거다!라고 박력 있게 내가 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