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니 Feb 07. 2023

선생님, 저는 계속 춤을 추고 있어요.

마치 내가 잘 춘다고 생각하며 춤을 추었던 그때처럼.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께서는 학급동아리 활성화에 진심인 분이셨는데, 당시 <인기가요>에 미쳐있던 나는 내 안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댄스부를 만들었다. 친한 친구들을 꼬셔 수업이 끝나면 놀이터에 모여 동선을 짰고, 우리 집 거실은 안무연습실이 되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어떤 노래로 춤을 출까, 어떤 몸짓으로 인기를 끌어볼까, 고민하던 11살.


나는 진짜 내가 춤을 잘 추는 줄 알았다.

롤링페이퍼에 적힌 그 말을 보기 전까지는.

12월, 이제 곧 겨울방학이 지나면 뿔뿔이 흩어질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매년 의례적으로 하는 이별이지만, 1999년도의 이별은 뭔가 슬펐다. 소심해서 발표도 못했던 내가 친구들 앞에서 춤을 추게 되었던 한 해였으니까. 나의 아쉬움을 아셨는지, 선생님께서는 롤링페이퍼 시간을 마련해 주셨다. 종이를 돌리고, 돌리고, 돌리다 보니 어느새 내게 돌아온 나의 롤링페이퍼. 자랑스레 쓰인 이름 석자 아래, 그러니까 연초록 색상지 오른쪽 하단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야, 너는 춤출 때 왜 그렇게 흐물흐물 거리냐.
무슨 연체동물 같아.


머리가 새하얘졌다. 연체동물? 흐물흐물? 나는 탁! 탁! 박자에 맞춰서 두둠칫! 춤을 추었는데? 내가? 정말 못 췄다고? 나는 보면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성급히 종이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물개박수를 치시며 환한 웃음으로 너무 잘 춘다고 엉덩이를 두들겨 주신 할머니의 칭찬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일기장에 선생님이 써주셨던 "오늘은 잘 추던데?"라는 칭찬은 또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면 연습할 때 친구들은 내 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본질(안무)보다 의상 선택에 신경을 쓴 것이 문제였을까. 정말 그 친구의 말처럼 연체동물이 되어 빠르게 작은 구멍으로 쏙 숨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투명한 베란다 창에 비친 동해에서 갓 잡아 올린 오징어 같은 몸짓으로 흐물거리고 있던 나를 직접 마주했던 그날, 그렇게 나는 춤의 재미를 잃었다. 미련 따위 없었다. 잘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못 했으니까.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11살, 나는 춤추는 걸 좋아했다. 음악프로그램에 나오는 댄스가수들의 화려한 발재간과 춤사위에 머리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근데 잘하지는 못했다.


13살,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했다. 4학년때부터 일기 쓰기에 재미를 붙인 뒤, 꾸준히 일기를 썼고,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잘하는 거였을까?


15살, 나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님 결혼기념일날은 물론이고 가족 생일마다 축하해 달라는 사연을 보냈고, 짧은 사연을 보내 상품을 받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18살, 나는 성대모사를 좋아했다. 6살 어린 남동생과 함께 어릴 때부터 포켓몬스터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일까. 우리는 틈만 나면 누가 누가 더 고라파덕 흉내를 잘 내는지 경쟁을 했고, 그 짓을 꽤 오래 하다 보니 동생을 이겨 먹고 싶었고, 무한 경쟁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20살, 나는 채팅을 좋아했다. 그 시절, 나의 별명은 <키보드 워리어>였다. 학교에 갔다 온 뒤, 저녁을 먹고 새벽 2-3시까지 친구들과 네이트온으로 수다를 떨다 보면 하루가 그렇게 짧을 수 없었다. 하루종일 네이트온으로 친구들을 웃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돈을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만 하다 4년이 지났다.


24살,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35살,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알게 됐다!



잘하는 건 더 잘하면 되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걸 잘하는 걸로!


여전히 나는 티브이를 보면서 연예인의 말투, 몸짓을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하고, 말도 안 되는 춤으로 동거인을 웃기는 것을 좋아하고, 인스타, 블로그, 유튜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재미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좋아한다. 몇 주 전, 동거인과 함께 심리상담센터에 다녀왔다. 1시간이 되는 상담시간 동안, 나는 어떤 타이밍에 어떤 멘트를 쳐서 상담선생님을 또 웃게 만들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지? 나 개그맨도 아닌데 왜 웃기고 싶어 하지?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린 뒤, 문을 나서는데 깨달음의 종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춤을 못 추지만, 괴상한 춤사위로 사람을 웃기는 것을 잘하니까, 이것도 잘하는 거 아닌가?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춤을 잘 추는 게 아니라, 내 춤으로 웃음을 주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닌가?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좋아하고 내가 즐길 수 있다면 그건 나에게 잘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꿈꾸고 꿈꾸었던 방송작가가 되지 못했지만, 이곳저곳에 나의 콘텐츠를 뿌리며 사람들을 웃기며 살 수 있다니 이건 꿈을 이룬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여전히 여러 차례 악플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다시는 글 안 쓰겠다는 각오로 브런치앱을 지운 적도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할수록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무기력한 오징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마치 내가 잘 춘다고 생각하며 춤을 추었던 그때처럼.


그러니까, 선생님. 저는 오늘도 한 마리의 오징어처럼 흐물흐물하게 멋진 춤을 추렵니다. 춤을 추고 사람을 웃기면 기분이 좋거든요. 저는 춤을 좋아하나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매번 대충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