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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Mar 21. 2024

선생님, 단소를 꼭 불어야 하나요?

누군가 말했다.

아무 걱정 없던 10대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내가 말했다.

"난 싫어. 그럼 단소 다시 불어야 하잖아."


요즘 여기저기서 회귀물이 인기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도 스페인의 어느 마을에서 맥주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외국인의 삶도 상상할 줄 아는 대문자 N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지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상상은 시작조차 어렵다. 회귀라니? 아니 그럼 내가 다시 2000년으로 혼자 돌아간 뒤, 단소를 잘 불어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단소스트레스에서 해방된 어린이가 될 수도 있다는 건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이미 상상함)


초등학교 시절, 대뜸 내 앞에 나타난 악기. 단소. 리코더 부는 것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나무를 깎아 만든 단소를 불라고 하다니. 염소 소리를 내었던 리코더를 졸업하니, 이제는 단소란다. 단소. 단소. 중임무황태. 중임무황태. 나머지 수업에 남아 단소를 불어 제치던 나는 생각했다. 이거 왜 하지?


그때는 몰랐다. 내 앞에는 이보다 더 많이 헤쳐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시절, 단소는 내게 절망이었고, 아픔이었고, 슬픔이었으며 지옥이었다. 단소를 부르면 부를수록, 나무에 닿은 기분 나쁜 내 침냄새도  싫었다. 아니 이거, 정말 왜 해야 하지?


생각해 보면, 단소 같은 것이 또 있었다.


체르니 30번이 될 때까지 졸업하지 못했던 피아노가 그 주인공 되시겠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피아노 학원에 다녔는데, 그곳은 목욕탕이었던 곳을 개조한 곳으로 습습한 냄새가 방마다 가득한 곳이었다. 개인 연습방은 열 개 정도였는데, 방마다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 조상님들의 이름이 써붙여져 있었고, 괜히 음악가들의 방에 들어갈 때면 콩쿠르 대회에 입장하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선생님이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는다.

"어제 연습 많이 안 했나 보구나?"

(대답 없음)

"오늘은 10번 치고 가야겠다. 내일 다시 확인할 거야."

네..

쿵쾅! 하고 문이 닫히면 나는 좁디좁은 독방에 억울하게 갇힌 죄수의 심정으로 피아노위에 철퍼덕 엎드려 줄줄 흐르는 콧물을 먹었다. 피아노는 왜 배워야 하는 걸까, 엘리제를 위하여만 칠 수 있으면 끝 아닌가? 엄마는 나를 정녕 피아니스트로 키울 계획일까? 원장님이 펼쳐놓은 노트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 10개. 그 위에 10개의 선을 그어야만 감옥 같은 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이 현실은, 피아노의 피 자도 관심 없던 초등학생에게는 정말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좌절과 절망의 공기만 흐르던 방 안에 앉아있으면  '헨델'방에 들어간 친구의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벽을 너머 들려왔고, 나는 여유롭게 코를 후비며 친구의 음악을 감상했다. 아예 피아노뚜껑을 닫고 그 위에 얼굴을 묻고는 감상에 젖기도 하고, 갑자기 연주가 중단이라도 되면 나는 벌떡 일어나 친구의 문 앞에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조용하지만 은근 선생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고집 있던 나는, 콧구멍에 손을 넣는 행위로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몇 년의 인고의 세월이 흘렀을까, 나는 체르니 30번을 완주한 어린이가 되었고, 마치 하나의 완장을 찬 자식을 바라보듯 뿌듯해하는 엄마의 미소를 끝으로 피아노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음표의 모양도 까먹은 내가 되었다. 눈을 감는다. 치지도 못하는 걸 왜 배운 거지? 차라리 태권도 학원에 보내달라고 떼 쓸 걸 그랬나? 같은 생각을 하다, 갑자기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리코더며, 단소며, 피아노는 내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온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진다. 친구들 앞에 나가서 떨리는 손으로 한 음 한 음을 내며 완주를 했던 리코더 시험날, 결국에는 중임무황~~ 태애애애 소리를 말끔하게 냈던 그날, 젓가락행진곡을 엔딩곡으로 마지막 피아노를 두들겼던 그날들의 순간이 떠오른다. 슬슬 웃음이 난다.


그래! 그 시절에 그렇게 하기 싫은 짓들을 해냈으니 (하기 싫은 일이 있고,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화를 절제할 줄 알며, 분을 삭인 뒤에는 어떻게든 해 내는) 지금의 내가 된 것이구나.

이건 마치, 피아노 치기 싫을 때마다 피아노 덮개를 덮고 엎드려서 콧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을 때 들었던 편안한 마음 같기도 하다. 그래, 하기 싫은 일을 대할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편해지는지 배웠고, 꾸준히 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구나. 오호. 그렇구나. 하며 오랜만에 손가락을 작은 콧구멍에 갖다 대본다. 아직 건재하게 남아있는 구멍을 만지작 거리며 하기 싫은 일을 하러 기분 전환 겸 카페에 나온 삼십 대 중반의 여성은 오늘도 하기 싫은 일을 미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쓰었으니 구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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