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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휘 Oct 23. 2019

이토록 즐거운 내리막길
[조커]

#20 매일을 참고 견디는 당신을 위한 영화

  아서 플렉 [호아킨 피닉스]는 코미디언을 꿈꾸는 광대입니다. 뭐 하나 잘난 구석도 없고, 삶에 희망과 즐거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어머니의 오랜 가르침대로, 항상 웃는 얼굴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억지로 한다고 되나요. 사람들은 아서를 쉽게 무시하고 때론 폭력을 휘두릅니다. 갑자기 학생들이 나타나서 광대 분장을 한 아서를 마구 때리고, 동료의 배신으로 다니고 있던 극단에서도 잘리고, 동경하던 최고의 TV쇼 진행자 머레이(로버트 드 니로)가 열심히 준비한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를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비웃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와 자신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까지 알게 되는데요. 그렇게 안 그래도 빈약한 아서의 이성을 지탱해주던 기둥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렸습니다.

거리에서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한 아서

  조금씩 고삐가 풀리던 아서의 광기는 우발적인 살인을 계기로 완전히 해방됩니다. 아서가 조커로 거듭난 순간이었죠. 그런데 아서가 죽인 사람은 알고 보니 고담시 최고의 기업 웨인 컴퍼니의 직원들이었고, 사건은 부유층에 대한 하층민의 반란인 것처럼 포장되어 많은 사람들을 자극했습니다. 시위는 점점 격화되며 도시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저지른 사건이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오는 것을 보며 아서는, 아니 조커는 처음으로 존재감을 느낍니다. 더 이상 참거나 망설일 이유가 없어진 조커는 거침없이 깊은 광기로 빠져듭니다.


새롭지 않지만 새로운

   줄거리로 보나, 캐릭터로 보나 [조커]는 새로울 것이 없을 영화였습니다. [조커] 관련 리뷰에 자주 언급되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1976)와 [코미디의 왕](1983)은 [조커]에서 볼 수 있었던 암울하고 칙칙한 분위기, 찌질이가 우연한 계기로 그동안 쌓여온 분노와 욕망을 터뜨린다는 줄거리, 주인공의 자기 파괴적인 심리 등을 이미 40년도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게다가 조커가 등장하는 영화는 이미 여러 편이 존재하고, 하나 같이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 열연을 펼쳤었죠. 그중에는 전설로 남은 영원한 조커, 히스 레저도 있었습니다. 2019년의 조커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걸작들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했죠. 그리고 알다시피, 아주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관람 포인트 1: 익숙하면서도 독창적인 스토리

  [조커]는 고담시, 자라서 배트맨이 될 브루스 웨인 등 기존 DC 코믹스 세계관에 등장하는 설정과 인물을 사용하여 최소한의 익숙함은 가져가면서도 '조커'라는 악당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더 나아가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인간적인 고찰에 집중합니다. 히어로와 빌런이 맞서 싸우는 기존의 히어로 영화와는 전혀 다르죠.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는 철저하게 아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렇게 하여 관객은 아서의 입장에서 그의 처지, 사회,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까지 엿볼 수 있게 됩니다. 거기에 영화의 현실적인 디테일과 전체적으로 높은 완성도가 뒷받침되면서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완벽히 광인이 되어버린 조커를 보면서도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데요. 생각해보면 꽤나 무서운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 그러니까 영화의 플롯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환상과 현실을 계속해서 뒤섞어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과대망상을 앓고 있는 아서의 정신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완벽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망상이었던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본 관객도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망상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함께 미쳐가는 거죠!


관람 포인트 2: 이 시대의 광기

  이 영화의 대표 장면 중 하나인, 아서가 광대 분장을 하고 빨간 정장을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각성을 하기 전 아서가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과 대비되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계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영화가 얼마 전에도 있었죠.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입니다.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매일 높은 계단을 올라 박사장(이선균)의 집으로 출근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들통날 뻔한, 폭우가 내리던 날 밤, 기택의 가족은 황급히 계단을 내려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위치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죠. 다시 계단을 올라갔을 땐 완전한 광기와 몰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아서와
정신 없이 계단을 내려오는 기택의 가족들

  [조커]와 [기생충]은 꽤나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유층과 하층민, 이성과 광기를 계단을 사용하여 표현한 것. 올라가긴 힘들지만 내려오는 건 순식간인 것. 어떻게든 계단 위에서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광기를 표출한 것 등.

  아서와 기택에겐 평생에 걸쳐 축적되어온 분노가 서려있었습니다. 그 분노의 정체는 멸시, 무시, 조롱, 기본적인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상황의 반복이었습니다. 모두 생활이 어려운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당해온 일들이었죠. '그래도 나아지겠지' '나도 언젠간 성공해서 멋진 삶을 살 거야'라는 희망으로 매일을 참으며 살아왔건만,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당할 때, 벼랑 끝에 몰려버렸을 때, 도화선에 불이 붙습니다.

  [조커]에서 아서가 겪는 약자의 고통은 어쩐지 익숙합니다. 현대사회에서의 불평등과 소외감은 아주 흔하면서도 심각한 문제니까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쉽게 잊히고 대체되고 무시당하는 요즘을 사는 우리는 조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적용 가능한 메시지는 이 정도입니다. 그 이상은 그냥 영화로써 즐기면 됩니다.


관람 포인트 3: 미친 완성도와 숨겨진 의미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와 영상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글로 표현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녀]에서 순박했던 테오도르가 이렇게 변하다니. 그저 놀랍다.

  영화를 유심히 보면 앞서 언급했던 과거 작품들에 대한 헌사와 레퍼런스도 찾을 수 있습니다. 머레이 프랭클린 역을 [택시 드라이버]와 [코미디의 왕]의 주연이었던 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건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그 외에도 다크나이트,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등의 작품들이 직간접적으로 인용되고 오마주되었습니다.


진작에 이렇게 좀 만들어주지

  대중성 짙은 히어로 영화 속 캐릭터가 사유의 깊이와 예술성을 갖추었더니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습니다. DC코믹스가 가진 장점이자 매력이지만 여러 번의 고전 끝에(...) 참으로 오랜만에 DC다운 작품을 만났습니다. DC는 역시 심각하고 어두워야 제맛이죠. [조커]의 성공이 DC가 삐까번쩍한 마블과는 다른 매력을 확실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내년에 할리퀸 단독 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의 개봉과 대박을 조심스럽게 기대해봅니다.



글: 정재훈

사진: 영화 [조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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