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주변 가득했던 포스트잇을 하나씩 떼어 노트로 옮기고, 나오지도 않는데 습관적으로 꽂아 두었던 펜들을 모두 버렸다. 서랍 가득 쌓여 있던 업무용 노트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모두 분쇄했다. 옆자리에 널 부러져 있던 각종 케이블 선을 정리하고, 고장 났는데 귀찮아서 가지고 있던 TestPC도 폐기 처분했다. 사용하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넣은 서랍 옆에 모니터 두 대를 가지런히 두고, 분홍색 포스트잇에 내 이름 석자 크게 박아 구석으로 옮겼다.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기계적으로 마지막 출근은 언제인지, 출산일은 언제인지, 성별은 무엇인지, 복귀는 언제인지를 브리핑하며 인사를 나눈다. 오래도록 같이 일한 협력 부서를 돌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이전에 같은 파트였던 옆 파트를 돌며 행여 좋은 소식이 생기면 꼭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1년 3개월 후를 기약한다. 매일을 함께 일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시던 같은 부서 사람들과도 그동안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인사를 마치고 나면 이제 정말 한동안 이 공간에서 내가 사라질 것이라는 실감이 난다.
7년간의 여정 끝에 잠시 쉼표를 찍었다. 그것은 고작 1년 3개월뿐인 쉼표라 짧다면 너무 짧기도 하고, 출산과 육아에서 기인하는 쉼표이기에 이것이 진정한 ‘쉬어 가기 위한 표시’인지는 의문이다. 9월 3일, 나는 오늘부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들어왔다.
3개월 이상 휴직에 들어가는 직원은 퇴직자와 비슷하게 취급된다는 것을 이번에 휴직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 소유의 문서들도, 사용하던 PC, 사내 자산까지 모두 이관하고 사원증까지 반납하고 나서야 휴직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출산휴가가 끝나고 육아휴직기간이 되고 나면 나는 복귀하기 전까지 사내 사이트에서 검색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 앞으로 잡혀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프로젝트를 참여하면서 쌓아온 자료들을 돌아보며 고군분투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프로젝트에 끌려 다니기 급급했던 내가 어느새 큰 그림을 보고, 그리고 싶은 것도 생기기 시작한 지금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1년 3개월의 공백은 적지 않은 아쉬움을 안긴다.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이제 혼자 집에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과 입이 근질거린다. 가장 의지했던 선배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는 미안함과 고마움, 아쉬움이 뒤섞여 살짝 눈물까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댄스가 슬금슬금 올라오는 이유는 한동안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을 것이라는 홀가분함과 한번쯤 잠시 쉬고 싶다고 생각했던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이제 당분간은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누군가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잠시 들뜬다. 육아라는 또 다른 업무가 날 기다리고 있겠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