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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Feb 04. 2023

여의도 라면집

윤수진이서울에서주말을 보내는 법

여의도라는 섬에 매일같이 발도장을 찍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여의도 한복판에 있는 회사에 입사해 한 번의 이직도 없이 게으르게 회사를 다니고 있다. 공교롭게도 집도 여의도와 그리 멀지 않아 주말에도 한 달에 두세 번은 여의도를 찾는다. 과거 주말이 되면 순복음 교회 근처를 제외하고는 유령도시처럼 텅 비었던 여의도는, 쇼핑몰과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한가한 식당을 찾기가 퍽 어려워졌다. 막상 괜찮은 식당을 찾더라도 여의도의 식당 가격을 보면 흠칫하게 된다. 일부 높은 한도의 법인카드를 가진 부유한 직장인들 때문인지 가격책정이 너무나 자비 없다. 여의도는 모든 것이 비싸다. 초보 여의도인 시절 국회의사당 앞 주유소의 가격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시중 대비 30%나 비싼 가격. 여긴 왜 이렇게 비싼가요? 물으니 국회의원들은 기름값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비싼 값으로 책정을 한단다. 비싸게 받는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캐시백이나 이벤트를 하는 듯했다. 꼬박꼬박 떼어가는 나의 세금이 아까웠다.


여의도 식당 문화의 핵심은 지하 아케이드이다. 각 건물의 지하에는 저마다의 식당가가 형성되어 있다. 개중에는 매체에 노출되어 유명해진 식당도, 여전히 근처 직장인들만을 공략하는 소박한 식당도 있다. 지하 아케이드의 핵심은 슈퍼 라면집이다. 지하마다 예외 없이 슈퍼와 라면가게가 결합된 퓨전 식당이 하나씩 존재한다. 요즘 유행하는 가맥집보다는 조금 더 식당에 가까운 느낌이라 할 수 있겠다. 주 메뉴는 단연 라면. 그 외에 김밥, 오징어 덮밥, 제육 덮밥을 판매한다. 가게마다 특제 해장 메뉴를 추가하여 숙취로 찌든 여의도인들을 구원해 주기도 한다. 법인카드가 없는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은 이런 지하의 작은 식당가가 동아줄이 되어준다.


회사 근처에 있던 한 지하 라면집을 회상해본다. 시그니쳐 메뉴는 콩나물과 김치가 들어간 해장 라면이었다. 우리는 이곳을 술이 덜 깬 아침에 해장을 하러, 빨리 먹고 쌓인 일을 할 수 있게 점심을 먹으러, 늦은 시간 야근을 하다 배가 고프면 저녁을 먹으러 그렇게 주구장천 방문했다. 불친절한 아저씨와 더 불친절한 아주머니가 있었지만. 선배들은 개의치 않고 식당을 찾았다. 나도 덩달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나는 주로 떡라면이나 오징어 덮밥을 먹었다. 같은 팀의 선배는 야채 볶음밥을 시켜 케첩을 잔뜩 첨가해 먹었고, 과장님은 매번 해장 라면에 양파를 빼고 주문했다. 양파가 들어가면 단 맛이 나서 라면의 맛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음식에 철학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기에 그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따라서 해장 라면에 양파를 빼고 주문을 해보았다 과연 칼칼한 맛이 더 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신입사원 시절에 과장님을 따라다니던 그 식당에 내가 과장이 될 때까지 문지방이 닳도록 다녔다. 라면에 밥까지 말아 든든히 먹고 나면 탄수화물로 가득 찬 몸이 지친 뇌에 극상의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어느 날, 야근을 하다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았더니 사장이 바뀌어있었다. 식당 이름과 인테리어는 그대로인데 사장만 젊은 남성으로 바뀌었다. 아들이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 누구도 직접 물어볼 깜냥은 없었다.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을 안고 메뉴를 살펴보았다.  아드님(일수도 있는 분)은 열의가 넘쳤는지 메뉴를 꽤 많이 개편해 버렸다. 해장라면이 사라지고 김치라면이 생겼다. 몇몇 메뉴가 사라지고 새로운 메뉴로 교체되었다. 해장 라면 대신 김치 라면을 시켜보았다. 그 과거의 해장라면이 그렇게 엄청난 맛이었냐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10년간 길들여진 해장 라면 대신 다른 맛이 느껴지는 것이 왠지 어색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는지 식당을 찾는 이는 점차 줄었고 어느 날 다시 찾아보니 라면집 간판이 내려가고 작은 선술집임을 알리는 네온사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 곧 나온다는 이야기에 영화의 원작이라는 책 ‘미키7’을 읽어보았다. 작중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아테네 시민들은 미노타우르스룰 죽인 영웅 테세우스의 배를 항구에 보존하기로 했다. 항구에 정착한 배는 시간이 갈수록 낡아갔고 시민들은 새로운 판자와 돛대로 배를 조금씩 수리했다. 어느덧 배는 새로운 부품들로 모두 교체되어 테세우스의 배에 원래 있던 부품들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배는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 안의 모든 것이 변했다 해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는 아이덴티티를 간직했다 할 수 있을까?


 여의도의 주변인으로 여의도를 관찰하며 10년을 보내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멀쩡하던 건물이 해체되고 새로운 건물이 올라갔다. 정 붙였던 식당은 사라지고 대신 들어온 식당은 몇 달을 못 버티고 새로운 식당으로 교체됐다. 회사 내의 인간관계도 쉬지 않고 변한다. 10년 전 입사했을 때 함께 했던 이 중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은 한 손에 겨우 꼽을 정도다. 변하지 않은 것보다 변한 것이 많다. 10년을 함께한 라면집이 없어져도 여의도는 여전히 나에게 여의도다. 계속해서 변해가는 여의도에도 아름답지는 않지만 익숙해서 소중한 것이 남아있다. 골뱅이 집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침을 튀기며 술로 피로를 씻는 회사원들, 항상 공사 중인 건물들, 100m 전에서도 담배 냄새가 나는 3번 출구 앞 흡연 구역, 쥐가 출몰하는 뒷골목, 점심시간 영혼 없이 여의도 공원을 빙빙 도는 직장인들, 그 안에 숨길 수 없는 삶의 고단함. 그래도 나는 여의도가 좋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다 해도 나는 이곳을 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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