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듯이 살고자 한다.
4년 전 오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 ‘후회스럽다.'였으니까, 나는 아빠처럼 죽지 않겠다고 1년간 고민 끝에 결정한 뒤 살고 있는 삶이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하루하루를,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노력한다. 당장 내일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바로 옆에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엿보던 시절을 지나, 무너져 내릴 때면 더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아빠를 찾아가던 시간을 지나, 지난 후회와 슬픔이 아닌 내일과 그다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찾는 횟수와 눈물을 보이는 날은 줄었지만, 동요 없이 내가 겪었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왠지 아빠는 내가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런 나를 기특하게 생각해 주었을 것만 같다. 나에게 항상 그렇게 말해주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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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가끔, 한 학교와 그곳에서 볼 수 있던 아이들이 떠오르곤 한다. 10월의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아래 놓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 나는 그곳에서 하루 5시간, 등교하는 학생과 교사의 열을 체크하고 복도를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어놓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10년의 시간을 떠돌다 돌아온 고등학교엔 내가 지나온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티 없이 해맑은 웃음으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만한 태도로, 위축된 걸음걸이로, 세상에 무관심한 얼굴로,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으로.
학교의 임시 구성원이자 낯선 이로서 목도한 학교의 풍경은 낯설었지만 정겨웠고, 변한 듯했지만 다름없었다.
중앙 현관에 둥지를 틀고 앉아있으면, 투명한 현관문 유리 위로 덕지덕지 붙은 각종 유의사항과 안내문 같은 인쇄물을 볼 수 있었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복도를 울리는 왁자지껄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음과 그 사이사이 적나라한 욕지거리도 왕왕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앉아있다 환기를 위해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어 놓을 때면,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가을 향 잔뜩 밴 바람이 나를 순식간에 집어삼키기도 했고, 창문 프레임 안으로 옆 학교의 교정과 곧 낙엽이 될 다채로운 빛깔의 나뭇잎들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어 잠시 동안 나의 시선을 뺏어가기도 했다.
8년의 시간을 떠돌다 돌아온 고등학교에서 낯선 이로서 만끽했던 가을날의 정취, 그리고 평화와 평온의 시간들.
잔잔한 흐름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던 것과 달리 당시 나의 내면은 사실, 불안으로 가득 차있었다. 오랜 시간 꿈꾸었던 계획을 기약 없이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을 내리지 못 한 채로 마냥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잠 못 들며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은 아이 하나가 파도쳐 가는 사람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을 낭비하다 뭐라도 일단 해야겠다 싶어 찾게 된 것이 이 일이었다.
불안 속에서 향유했던 가을날의 정취와 평온한 시간들. 그 속에서 나는 내가 지나온 세월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도 있었다. 교사의 입장에 더 공감을 할 수 있는 나이에서 바라본 학교는, 처음엔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변한 것처럼 느껴졌었다. 두발 제한 없이, 진한 화장과 피어싱을 하고,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처음 마주했을 땐 말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학생들과 교사들의 얼굴이 익어가고 낯설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서야 겉모습을 빼놓고 보면 우리 때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러했고, 내 친구들이 그러했듯, 평화롭고 작은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그중에서도 한 아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눈에 띌 때면 항상 밝은 모습으로 장난을 치고 있던 아이. 꺄르르하고 웃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과하게 밝은 사람들 속에는 보통 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이가 되었지만, 그 아이만은 어둠 없이 그저 밝게만 자라 온 친구였으면 하고, 바랐다. 불안으로 흔들리고 막막한 어둠으로 가득 찼던 내 내면을 밝은 웃음의 인사로 환하게 해 주었던 그 아이만큼은 말이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그 아이가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든, 어떤 상황이든, 그 빛나는 모습으로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