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저속주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성준 Nov 08. 2021

가족이라는 이름의 과속방지턱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떠나야지만 시간이 느려지는 것이 아니다. 월화수목금금금 바쁘게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은 대체로 자연 앞에서 그 기세를 수그러뜨리지만 그 앞에서보다 시간이 더 겸손해지는 공간이 있다.


늦은 여름 휴가를 얻어 제주도에서 시작한 일정은 김녕, 우도, 비양도를 거쳐 여수 개도, 백야도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는 청송으로 떠나려 했지만 오랜 노숙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친 탓인지 집밥 생각이 간절했다. 남은 계획을 접고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냥 집에 가기는 아쉬워 고향 친구들을 만나 한잔 거나하게 걸쳤다. 밤늦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관 앞까지 나온 엄마 아빠가 꼭 토끼같다. 쓰린 속을 부여 잡고 있는 내게 엄마가 내놓은 음식은 카레라이스. 3분 즉석 카레가 아닌 재료를 듬뿍듬뿍 썰어넣은 진짜 카레. 심지어 고구마도 들었다.


집에 머무는 동안은 배가 고플 틈이 없다. 소고기에 우럭에 전복에 잔치국수까지 집에 있는 재료란 재료는 전부 털어 나를 먹일 작정인 게 틀림 없다. 오렌지, 키위, 사과, 배. 냉장고 안에 그렇게 많은 과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밥 때도 따로 없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만들어 주고 배 안 고프다고 해도 모니터 앞에 과일 접시가 놓여진다. TV를 보고 있으면 간식거리가 끊임없이 배달되고 그렇게 먹고 자고 놀며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알람 맞추지 않고 아침햇살에 눈비비며 눈뜨고 별다른 할일없이 하루를 소비하며 해질무렵 찌뿌둥하면 산책이나 할까 하며 집을 나선다. 


그런 며칠이 반복되고 다시 서울에 있는 지금, 그 시간들이 꿈만 같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가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 속에서 지난 일들과 앞으로 있을 일들을 염려하며 흘려 보냈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엄마 아빠의 표정 하나, 한 마디 말 같은 것들을 좀 더 새겨둘걸 새겨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딱딱 시간표에 맞춰 돌아가는 일상에 숨이 차서 떠났던 여름 휴가. 그 안에서조차 오늘은 뭘할지 내일은 뭘할지 따박따박 계획을 세우는 계획형 인간. 일몰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걸음을 재촉하며 주변 풍경을 다 놓치고 배시간을 맞추기 위해 혹은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속도를 냈던 그런 시간들.


여행이 과속방지턱이라고 주장하며 그럴싸한 헛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 어떤 과속방지턱보다 빨라진 일상의 속도를 늦춰주는 건 가족임을 나는 안다. 가족과의 시간만큼 빨리감기 되고 있는 일상 속도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은 없다. 온 계절과 온 자연이 식탁 하나에 공존하게 만드는 엄마의 밥상. 뾰족하고 조급한 마음을 조금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엄마 아빠의 푸근한 미소. 


살면서 중요한 건 높이 올라감이나 멀리 나아감 혹은 많이 벌어들임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주는 시간들. 하잘것 없는 것들에 너무 열올리고 살았던 건 아닌지 반성해 본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휴가는 끝났다.

이제 조금 더 푸근해지고 둥그래진 마음으로 나는 출근을 준비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