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수의 왕 Jan 26. 2023

책으로 쌓아 올린 탑

- 블루블랙 망월장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즈음의 일요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단지에 책을 가득 담은 트럭 한 대가 들어왔고, 차에 탄 사람들은 확성기를 통해 큰소리로 주민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정확하게 무슨 말이 흘러나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눈에는 트럭에서 내린 남자들이 실려있던 책을 우리 집으로 나르는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생애 첫 도서전집의 책들이 내 앞에 거대한 탑처럼 쌓이고 있었다.  


 미쳐 한글도 떼지 못하고 입학한 1학년 짜리에겐 글씨가 가득 찬 작고 단단한 책들은 마치 탑을 이루고 있는 벽돌 같이 느껴졌지만, 아들을 위해 한 권씩 읽어주시던 부모님들 덕분에 나의 작은 머릿속은 점차 신비한 환상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그토록 맛있는 이야기를 접하기 시작한 소년의 왕성한 책탐은 일에 지친 부모님의 일요일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런 보챔에 지친 어른들은 그 책은   직접 읽으라고 사주신 것이라는 확실한 의사를 전달하셨다. 그렇게 나만의 독서여행이 시작되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 시작한 독서는 어린아이에겐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고 답답한 마음에 책장에서 책들을 여러 권 꺼내 들고 이것저것 넘겨가며 노력했지만 그림도 거의 없던 세계문학 전집은 쉽게 공략되지 않았고 그렇게 책들은 매일  이 탑에서 저 탑으로 옮겨지고만 있었다.   


 하지만 7살의 남자아이가 누구이겠는가? 매일같이 책을 들고 씨름하던 꼬마에게 어느 순간 멋진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 저돌적인 공상가에게 벽돌 같던 책들이 마치 블록장난감의 조각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는(부모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100개의 멋진 장난감 조각이 생겼고,  이 멋진 장난감들을 가지고 하루는 인디언 텐트를 치고, 하루는 멋진 왕자의 성을 쌓고, 그리고 또 하루는 끝없이 뻗어 올라간 탑을 만들며 나만의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듯 유년시절 책이 나에게 남겨준 멋진 환상들은 책 안에 담겨있는 글을 통해 만들어지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책과의 씨름을 통해 생겨난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애착이었다.   


 하루하루 책에 둘러 쌓인 채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던 아이는 마침내 어느 날 100권 중에 하나를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첫 성공이 어느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어떤 책이 처음이었을지 그리 궁금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책으로 쌓인 다양한 모습의 탑들이 그 형상을 통해 나에게 심어준 즐거운 경험들 덕분에 나는 책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그렇게 책과의 첫 인연이 맺어지자마자 그 나머지 99권과도 쉽게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함께 늘어가는 책들이 다시 7살 소년시절처럼 서재 여기저기 탑처럼 쌓여 간다. 단지 외형으로만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책들이 쌓여가며 탑을 만들어 낸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마도 쌓아 올려지는 책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리라 믿는다.  


 우리 책벌레들은 각자 어떤 방법으로든 책을 쌓아 올리고 있다. 글자들이 모여 줄을 이루면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쌓여 올라가면 글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글들이 각각의 모양에 맞는 상자에 담기면 우리는 그 상자들을 책이라고 부른다. 신발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신발상자들을 쌓아 올려 섬기고, 카메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빈 카메라 상자들을 쌓아 놓고 만족하겠지만 문장을 사랑하는, 글을 갈구하는 우리들은 책을 쌓아 올리며 하루하루 저 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는 것을 갈망한다. 진실을 찾고자 또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늘에 닿고 싶었던 바벨의 탑을 쌓던 그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어느 정도의 높이를 가진 탑 위에 올라선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을 사로잡은 유년시절의 책은 무엇인가요?"란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고, 왠지 모르게 이 질문에 답을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난 내가 쌓아 올린 책으로 만든 탑의 바닥들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갑자기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아마 퇴계 선생도 그렇게 그의 시 "독서여유산"을 짓게 되셨으리라.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은 글을 읽는 것이 산을 거니는 것 같다고 하나 

 今見遊山似讀書   지금 보니 산을 거니는 것이 독서로구나 

 工力盡時元自下   힘을 다해 행한 뒤, 원래의 시작으로 스스로 내려옴이 

 淺深得處摠由渠   그 얕고 깊은 곳들을 두루 살펴보아야 함이 같구나 



나를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게 한 유년시절의 추억을 퇴계의 시와 함께 다시 한번 가슴에 품어본다.





예전에 블루-블랙이라는 곳에서 열었던 망월장( 주최 측의 설명에 의하면 달밤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글짓기 솜씨를 겨루는 것을 망월장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에 지원했던 글입니다. 뽑히면 책을 준다길래 그 무서운 책 욕심에 지원을 해서 2번 뽑혀 책을 받았었는데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더 이상 망월장이 운영되지 않더군요. 안타까운 마음에 브런치에 올려 봅니다.

블루 블랙의 홈페이지는 http://blue-black.life/ 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그림의 방 - 서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