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블랙 - 망월장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가끔 음식 방송을 보며 코로나로 억눌린 욕구불만을 달래던 차에 전북 정읍시의 음식점들을 소개하는 편을 시청하게 되었다. 다른 편과 달리 진행자가 정읍의 정자가 우물 정(井) 자라며, 우물이 많은, 물이 좋은 고장이었으니 음식의 맛이 다를 것이라는 사족을 붙이는데 과연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그리고 일상적인 무색무취의 액체, ‘물’이 음식의 맛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순간 머릿속엔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장면이 빛바랜 사진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어린 시절엔 방학 때마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서 며칠을 지내다 오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몇 학년 때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이 기억은 여름 방학이 되어 할아버지 댁에 내려간 추억 중에 들어있었다. 여름의 시골 생활이 늘 그렇듯이 너무 더워지기 시작하면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지니, 어른들은 이른 아침부터 일하러 들에 나가시고 혼자 집에 남아서 더위를 피한답시고 대청마루 위에서 몸과 닿은 곳이 뜨끈해지기 시작하면 이리 뒹굴고 또다시 저리 뒹굴며 그나마 시원한 바닥면을 찾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나를 불쌍하게 여긴 동네 형들이 아랫마을 개울가로 낚시를 하러 가는데 끼워주었다. 동네 형들이라고 해봐야 어리기는 매한가지였으니, 세상물정 모르는 초등학생들의 신기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놀러 온 누군가가 고향에 버리고 간 낡은 낚싯대와 라면 그리고 라면을 끓일 수 있는 냄비와 잡은 물고기를 담아 올 물주전자 정도가 우리가 챙겨간 전부였던 것 같다. 기술도 없고 경험도 없던 아이들이니 미끼로 쓸 지렁이를 찾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낚시는 정작 제대로 시도도 못해본 것 같은데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개울물을 떠서 끓여 먹었던 라면 맛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에 멋진 모험과 함께 즐겼던 엄청 맛있던 라면 맛 같은 훈훈한 기억이 아니라, 개울물을 그대로 퍼서 끓인 바람에 국물에 모래가 잔뜩 섞여서 라면을 먹는 내내 모래의 버적거림이 입안 가득히 남았던 아주 씁쓸한 기억으로 말이다.
그날 저녁 나의 이야기를 들으신 할머니의 반응은 지저분하게 그런 물을 마시면 안 된다는 내가 예상했던 답과 달리 그저 웃으시면서 개울물은 뭐가 많이 떠있으니 그걸 그냥 마시면 당연히 그렇지 정도셨다. 물론 시골이라고 개울물을 퍼서 식수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먹는다고 크게 지저분하거나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때인 것 같다. 하긴 당시 학교에서 하교 후에 공을 차고 놀다가 목이 마르면 운동장 구석에 있는 수돗가로 뛰어가 배가 가득 차도록 수돗물을 들이켜곤 했으니 마시는 물에 대한 생각이 현재와는 많이 다르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물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평범하고 공짜인, 어떤 고마움도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물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88년 서울 올림픽 즈음이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물에 관한 요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친척 형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는 같은 반 한 친구가 미국 사람들은 돈을 주고 투명한 병에 들어있는 물을 사서 마신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미국 사람들은 미친 것 아냐? 물을 음료수처럼 돈 주고 사마신 다고?”라며 어려서 어린이 동화 버전으로 읽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갖은 추측과 억측을 침을 튀겨가며 각자만의 황당한 버전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문은 곧이어 올림픽 관람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많은 외국인들의 모습을 통해 사실로 확인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산등성이를 따라 흐르던 개울물도 떠 마시던 나의 어린 시절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플라스틱 물병이 등장하기까지의 길지 않은 세월 사이에 일상의 평범하고 흔해빠진 것으로만 여겨졌던 ‘물’이 값을 치르고 마셔야만 하는 귀중한 자원으로 변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물이 부족해서 생기는 불편을 겪지 않은 축복받은 환경에서 태어난 덕분에 목마름의 고통을 체험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에 대한 감사함을 그때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너무 어린 나이에 읽어서 사방이 물 밖에 없는 망망대해에서 목마름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던
<노인과 바다> 속 산티아고 노인이 이야기하던 인생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떠오른다.
어느덧 이젠 인생에서 꽤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알만한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 우연히 맞닥뜨린 물에 대한 추억들은 나로 하여금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그래서 미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되새기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예전에 블루-블랙이라는 곳에서 열었던 망월장( 주최 측의 설명에 의하면 달밤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글짓기 솜씨를 겨루는 것을 망월장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에 지원했던 글입니다. 뽑히면 책을 준다길래 그 무서운 책 욕심에 지원을 해서 2번 뽑혀 책을 받았었는데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더 이상 망월장이 운영되지 않더군요. 안타까운 마음에 브런치에 올려 봅니다.
블루 블랙의 홈페이지는 http://blue-black.life/ 입니다.
망월장에 뽑혔던 또 다른 글은
https://brunch.co.kr/@milanku205/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