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 part.4
니체는 "초인은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진정한 사회, 각자가 본래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또한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펼쳐진,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회입니다. 결국, 둘 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행복을 추구할까요? 이에 대하여 깊게 고민한 사람이 있었으니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입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다음과 같다. 바다에 물 위는 의식의 세계, 물밑은 무의식의 세계, 그 사이를 넘나드는 파도는 전의식의 세계이다. 이 바다의 정신이라는 빙산이 떠 있다. 이 빙산은 물 위에 생각하고 사고하는 등, 의식할 수 있는 빙산의 일각인 [자아], 물 밑에 보이지는 않지만, 빙산 대부분을 구성하는 [원초아], 원래의 빙산에 새롭게 얼어 자아와 원초아 모두에 형성되어 있는 얼음 [초자아]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먼저 자아는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 생각을 합니다.
“우왕……예쁘다! or 잘생겼다!”
그리고 원초아가 무의식중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저 사람이랑 사귀고 싶어 고백해야겠어!”라며 바로 다가가 고백하려는 순간!
초자아가 이를 막아섭니다.
“바로 고백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 전에도 그랬잖아……”
이처럼 경험이나 배움, 지식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억제합니다. 그리고 다시 자아는
“먼저 호감을 얻어야겠지? 어떻게 해야 할까?”
와 같이 이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이처럼 자아는 초자아와 원초아, 외부의 억압이 대립하고 억제하며 자아를 형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의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억압에 대해 고통받고 있고 정신적인 병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프로이트는 이러한 억압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자유롭게 소리치는 행위, [카타르시스]를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행복해지는 방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에 대하여 프로이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본능이 있다. 삶을 유지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에로스적 본능]과 자신의 고난을 남에게 표출하며 파괴에서 쾌락을 느끼는 [타나토스적 본능]이다. 인류는 에로스적 본능을 통해 사랑하는 이에서 가족, 더 나아가 사회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는 타나토스적 본능을 통해 권력, 지배, 착취 등 여러 모습으로 위협받고 이는 다시 공동체에 의해 억제되고 이러한 노력으로 문명이 생겨났고 어떻게 억제하는지에 따라 문화가 발전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발전해도 발전을 통해 더 행복해졌다 말하기 어렵다.”
프로이트는 에로스적 본능과 타나토스적 본능이 서로를 억제하기 때문에 완전히 충족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행복이 완전히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추구할 수 있고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