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봐도 설레는 스토리가 있다면 바로 계약 연애, 혹은 계약 결혼이다.
유치하면 뭐 어때요, 재밌으면 됐지.
타임슬립과 더불어 계약 연애 역시 뻔한 소재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이런 이야기는 늘 있었다. 계약 연애 스토리는 어제오늘의 드라마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늘 쓰이는 소재가 또 쓰이는 것은 언제나 보장된 재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은 플롯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기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비슷한 소재를 바탕으로 언제나 예전 것보다 더 발전된 스토리를 만들어 왔다.
2004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풀하우스>는 집 계약 사기로 불가피하게 한 집에 살게 된 톱스타 영재(정지훈 분)와 지은(송혜교 분)이 서로의 사정에 의해 위장으로 부부인 척 연기를 하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이다. 계약 사랑 이야기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드라마로 가수 비는 배우 정지훈으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곰 세 마리'라는 동요와 함께 배우 송혜교의 러블리함을 전국에 알리게 되었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OST 역시 드라마만큼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커피 프린스 1호점>과 더불어 내 또래 여성들이 마음속에 워너비 드라마로 자리 잡고 있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들 역시 계약 연애를 시작한다. 삼순(김선아 분)은 돈이 필요했고, 진헌(현빈 분)은 어머니의 맞선 강요에서 오는 결혼 압박을 벗어나고 싶었기에 계약 연애를 진행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당연히 그렇듯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5천만 원을 갚네 마네 하기도 하고, 비 오는 날 한라산 등반도 하며 해피엔딩에 다다른다. 당시 이 드라마가 가졌던 영향력에 대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사랑했고, 모두가 삼순이로 빙의해 삼식이와의 연애를 이어나갔다.
결혼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짜로 결혼을 하기 위한 스토리는 2014년에 방영되었던 <연애 말고 결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혼자 있고 싶어서 위장으로 결혼하려 했던 남자 기태(연우진 분)가 정식으로 결혼 반대 선언을 받아내기 위해 절대 집에서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은 여자 장미(한그루 분)와 계약 커플이 된다. 마음이 없다 못해 조금은 악연으로 만난 남녀가 서로에게 물들어가며 사랑을 느끼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계약 연애 스토리의 정석으로 밟고 있는 드라마다.
연애하는 척하며 진짜 연애를 하는 스토리가 있다면 사랑 없는 결혼으로 시작해 사랑이 가득한 부부로 끝나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름마저 클리셰 범벅인 '정략결혼' 이야기이다.
2019년에 방영되어 한 동안 내 머릿속, 가슴속에서 나가지 못하고 맴돌았던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도 정략결혼 커플이 나온다. 집안끼리의 이해관계 때문에 결혼한 가경(전혜진 분)과 진우(지승현 분)는 사랑으로 결혼을 시작하지 않았어도 부부는 결국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커플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설레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면 말이다. 결혼 생활이 오래되면 사랑이나 정보다도 상대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긴다더니 이 커플이 딱 그 상황이다. 서로가 불쌍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듬다가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가경을 사랑하지만 가볍게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진우의 모습을 보며 많은 여성이 대리 설렘을 느꼈고, 시청자는 메인 커플이었던 타미(임수정 분)와 모건(장기용 분)이 잘 되기를 바랐던 것만큼 가경과 진우도 끝내는 '천년만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가 되기를 바랐었다.
첫 회부터 이슈가 되었던 드라마 <철인왕후> 역시 정략결혼 스토리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역사 왜곡 등의 문제가 있어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단 흥미 유발 측면에서는 확실히 시청자를 사로잡은 게 분명하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야 말로 정략결혼 커플의 끝판왕이 아닐까. 사랑이고 나발이고 진정한 계약의 의미만을 가지고 계속 간다면 권력의 암투를 다루는 사극이 되겠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싹트는 순간, 역사 로맨틱 코미디가 펼쳐진다. 소용(신혜선 분)과 철종(김정현 분)이 서로 노타치 아닌 노타치를 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내 친구가 어떤 남자와 모종의 거래를 하며 사귀는 척을 한다, 엄마한테 결혼할 남자라고 소개한다고 하겠다고 하면, 그러다가 그 남자가 진짜로 좋아져서 돌아버리겠다고 하면 지랄도 아주 다채롭게 하는구나, 하며 욕을 했겠지만, 드라마니까 뭐. 픽션의 세계에서는 사랑을 계약한다는 이야기도 설렘으로 다가올 수 있다.
계약 연애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자신만만하다. 절대 이 여자와는, 혹은 이 남자와는 죽어도 사랑에 빠질 일이 없으며 그렇기에 사랑하는 척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경솔하기 그지없는 그 자신감은 머지않아 주인공을 쩔쩔매게 만드는 감정의 시발점이 된다.
시청자는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의 반전을 보면서 재미를 느끼게 되는 듯하다. 계약으로 이루어져 무감각했던 사이가 결국엔 사랑으로 끝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으로 다가온다. 정략결혼을 한 커플이 서로 삽질하면서 헤매다 결국에는 폴인럽하는 스토리는, 특히나 차갑기 그지없던 남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계약 상대방에게 사랑을 느끼며 허물어지는 그 스토리는 너무 뻔하지만, 너무 재밌다. 재밌어. 진짜 너무 재밌어. 너무 섹시해. 완전 짜릿해, 늘 새로워.
결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어느 정도 없어야지 너무 모르니까 이런 이야기를 쓸 때마다 이상한 죄책감이 들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부담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픽션인데 뭐 어때.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계약 연애 이야기도 십여 년째 잘만 나오는 던 걸.
아직도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보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후속편의 개념으로 지난 2008년과 2010년에 1, 2편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물론 드라마의 감동이 영화까지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평이 많았지만(특히 2편이), 그래도 나와 같은 드라마 마니아들에게는 꽤 소중한 작품이었다.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2>에서는 주인공 캐리와 빅이 결혼한 이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너무 지루해진 부부 생활에 염증을 느낀 캐리가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거기서 우연히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는 스토리가 펼쳐지는데, 결국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건 아이가 있든 없든, 한 침대에서 자든 아니든, 다양한 부부 유형이 있으니 남들 의식하지 말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와 동갑인 외사촌은 재작년에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가졌고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아이를 늦게 가질 거면 굳이 이른 나이에 결혼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냐는 것이 그 부부의 결론이었던 듯하다.
반면, 주는 딩크족이 되기로 했다. 아기를 좋아하던 그녀였기에 약간 의아한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잠깐만 아이를 보는 것과 키우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지금 당장은 둘 만의 결혼 생활을 약속한 것이다.
결혼뿐만 아니라 연애도 마찬가지다. 간단하게는 소개팅으로 만나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갑자기 사귀기도 하고, 전남친의 친구와 사귀기도 하고, 클럽에서 만나기도 하는 게 사람 인연이었다. 맨날 싸워도 제대로 헤어지지 못하고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커플도 있으며 일주일 7번 만나는 커플도 있는 반면 주말 커플, 월말 커플도 있기 마련이다.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다양한 결혼 생활과 연애 방식이 있다. 모두가 같은 패턴으로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너무 억지스럽고 보기 거북하지만 않다면 작가는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주인공의 연애와 결혼 생활을 그려낼 수 있다. 정략결혼 스토리는 물론이고, 부부싸움 이야기나 불임 커플, 딩크족 등등은 내가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이제 그런 핑계는 이제 바이 바이. 오늘도 나 같은 작가 지망생들이 해야 할 일은 역시나 뻔한 소재를 뻔하지 않은 플롯으로 이끄는 능력을 키우는 것뿐이다.
(모든 사진의 출처는 해당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