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기분> 박연준 산문
2021년 그해를 보내는 아침, ㄱ이 이 책을 내게 건넸다. 대전 ㄱ의 집에서였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들이닥친 빛 덕분에 ㄱ의 작은 집은 더욱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때 내 마음은 고맙기보단 미안했다. 안 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책 앞쪽에는 편지도 쓰여있었다.
새해에는
지숲에게
놀라운 변화들과 함께
쓰는 기분도
찾아오길 바라며…
2021.12.
지숲의 벗 ㄱ 드림
그 애의 성격에 맞지 않게 조막한 글씨는 연필로 쓰여있었다.
읽지도 않을 것 같은데 쓰라니…
편지말 뒤로는 더 넓은 면적에 걸쳐 뭔가가 쓰였다가 지우개로 꼼꼼하게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애써 들여다보면 이런 글자들이 보였다.
지숲
매년
인지도
3년
올해
모이자고
고마워요
드립니다
웃는 건지 마는 건지 하는 얼굴로 받아는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2022년 겨울 2023년 겨울을 지나 만 2년을 넘긴 이 봄에 나는 어쩌다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을까?
한창 쓰고 싶었던 즈음이었다. 일기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싶었다.
그러다 쓰고 있었던 즈음이었다.
첫 장을 넘겨 읽기 시작했고, 그러자마자 거짓말처럼 이 책이 정말 좋아졌다. 하루하루 보물처럼 읽고 가만히 머물기도 깃털에게 “들어볼래?” 읽어주기도 했다.
이 책은 일종의 시 작법서다. 시가 낯설고 어려운 독자들에게 말한다. 시는 멀리 있지 않다. 당신도 쓸 수 있다. 시작하기가 어렵다면, 이렇게 해보라. 이런 방법도 좋다. 나는 이렇게 해봤다. 이렇게 해보니 이런 글이 쓰였다. 어때? 당신도 해보라.
어떤 페이지에는 빈칸이 있어서 독자더러 직접 그 자리를 채우라는 데도 있었다. 연필을 들었다가 펜을 들었다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연필을 들어 빈칸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그 순간도 좋았고 그렇게 쓴 내 글도 좋았다.
한 꼭지 한 꼭지 정성껏 읽으며 마음속 물결이 거세어졌다. 거기 물이 있는 줄도 잊고 있었는데. 정말 시를 쓰고 싶어졌다. 시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다만 그 넘실대는 물을 가만히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뭐라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정말로 쓰는 기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쓰는 기분만큼 찾아온 건 친구들을 떠올리는 기분이었다. 시를 쓰고 싶다던 친구들, ㅇ과 ㅂ이 생각났다. 두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친구들의 쓰고 싶었던 마음이 풀어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어준다면, 정말 좋겠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 의미있는 일이 많은데, 하필이면 글을 써보자고 끙끙대는 이 친구들은 얼마나 귀한가. 친구들의 글을 읽는 일도, 그 글을 읽고 1대 1로 나누는 저자와의 대화도, 그들이 내 글을 읽고 나눠주는 이야기도 값진 선물이다.
그리고 ㄱ. 이 책을 준 ㄱ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쩌면 조금은 불편한 사이다. ㄱ을 만날 때면 나는 약간의 긴장을 한다. ㄱ을 살피고 말을 고른다. 삼가는 마음이라고 할까? ㄱ하고 함께하는 이 시간을 더 충만하게 채우고 싶어 그런 것 같다. 노력은 그 이상의 대가를 떠안겨준다. ㄱ을 만나고 돌아오는 날 나는 조금은 달라져있다. 연중 얼마 되지 않은 만남이지만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되어 내게 남아있다.
살아가는 일에 발받침이 되어주기도 하고 공을 멀리 날릴 수 있도록 하는 동력기가 되기도 한다. 힘든 싸움에서 아주 느긋하고 진득한, 뭣보다 무너지지 않는 강한 군대가 되어주기도. 기똥차게 즐거운 일이 생기면, 다음 너를 만날 때 이 일을 재현하리라! 신나는 상상을 하게도 하는.
다음 만남에서 이 책을 이제야 읽은 이야기를 ㄱ에게 할 생각에 들뜬다. 기왕이면, 한 편의 글을 써서 ㄱ에게 제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