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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숲 Mar 16. 2024

찔레꽃 향기

뽀구리는 어느사이 손과 발이 다 자라고 꼬리도 짧아졌다. 그건 뭍에서 의젓하게 살아야하는 뜻이라 했다. 하지만 뽀구리는 물 속이 좋았다. 올챙이 동생들과 노는 게 제일 즐거웠다. 그런 뽀구리가 막걸리를 좋아한다니 어른들이 놀렸다. 


“너 인마, 애들은 막걸리 마시면 못써! 막걸리 마시려면 어른이 돼야지.”


뽀구리는 곰곰 생각했다. 막걸리가 좋은지 물 속이 좋은지. 하나만 고르려니 쉽지 않았다. 그런 뽀구리의 고민을 들은 람지가 말했다.


“정말 어려운 선택이다. 언젠가 ‘이거다!’ 의심없이 고르게 될 때까지 둘다 맘껏 좋아해보면 어때?”


뽀구리는 막걸리를 최선을 다해 좋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다다가 나무에 매달려 하루종일 집 짓고 밥 챙겨 먹는 동안 뽀구리는 올챙이 동생들을 이끌고 대장처럼 연못을 휘젓고 다녔다. 약속 시간을 세 시간이나 앞두고서는 제일 멋진 안경을 쓰고 한껏 멋을 냈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잠히 앉아 저녁 모임을 기다렸다. 오늘도 막걸리를 아주 맛있게 즐기고 싶으니까.



“오늘 마실 막걸리는 두털이가 준비했어.”

모두를 초대한 람지가 말했다. 

“한동안 이 모임은 두털이가 이끌어줄거야. 두털이를 소개할게!”


아까와 달리 흙먼지를 모두 털어내고 털도 한쪽으로 가지런히 빗은 두털이가 인사했다.

“안녕! 나는 두털이야. 여기 람지네 웃골까지 오는 일은 드물어. 오늘 좀 긴 여행을 했네. 그래도 너희들을 만나니 무척 반갑다. 나는 저 아래 별마을에 살아.”


“별마을? 거긴 사람 많은 동네잖아. 정말 거기 산다고?”

뽀구리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응, 조금 불편해도 거기 먹을 게 많거든. 막걸리도!”


두털이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막걸리라는 걸 알게 되고 즐긴지 8년 정도 된 것 같아. 8년 전에는 막걸리 종류가 얼마 없었는데 요즘은 정말 많아졌다! 그동안은 새로 나오는 막걸리를 전부 맛보았는데 이제는 모르는 막걸리도 많아. 막걸리가 너무 맛있고 좋아서 지금은 막걸리 연구실을 준비하고 있어. 아마 다음 달에는 열게될 거야.”


“막걸리 연구실? 거기선 뭘하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다다가 물었다.

“맛있는 막걸리를 마시고 맛있는 막걸리의 비밀을 캐내지. 마침내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막걸리를 만드는 게 목표야!”


누군가 곧이어 내뱉을 한마디를 얼른 막으려는 듯 두털이가 서둘러 말했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고, 이제 오늘 준비한 막걸리를 마셔볼까?”

뽀구리는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고 다다는 점점더 두털이가 궁금해졌다. 


“이 막걸리는 그동안 맛본 녀석들이랑 좀 다를 거야. 좀 맑아.”

“맑다고? 막걸리가?”

“그래. 샘물처럼.”


두털이가 준비한 막걸리를 제 얼굴 앞에 들어 보여줬다. 병 뒤로 두털이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투명하네!” 람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금빛깔 맑은 술 너머 두털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다다가 말했다.


“석양 같기도 해…”

두털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막걸리는 아주 맑은 내일을 예고하는 듯 붉은 석양빛이 되었다.


람지가 투명한 잔을 널판 위에 올렸다. 산에 버려진 유리병 파편을 닦고 닦아 매끄럽게 만든 잔이었다. 두털이가 뚜껑을 열고 막걸리를 따랐다. 달콤한 향이 피어올랐다.


한모금 머금자 콧속으로 찔레꽃 같이 진하고 달큰한 향기가 훅 찌르고 올라왔다. 다다는 깜짝 놀라 꼴깍 삼켰다. 찔레꽃 가시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져서 목구멍을 간질이는 듯 했다. 작은 가시들은 가슴을 따라 흘러들어갔다. 간질간질.  


“정말 샘물 같다. 샘물처럼 깨끗하다.”

아침마다 약수터에 가는 람지가 말했다. 


“맛있어!” 

뽀구리가 외쳤다.


그순간 두털이가 막걸리 병을 흔들었다. 어랏! 투명한 막걸리가 하얗게 변했다!

“이것 봐, 막걸리 맞지?”


그런데 좀더 연한 막걸리였다. 두 번째 잔을 받아 마시니 이번엔 가시들이 솜털처럼 포근하게 다다의 가슴을 감쌌다. 


“이 술은 과천미주야. 지게미를 줄여서 맑게도 마시고 진하게도 마시는 막걸리야.”


과천에서 나온 아름다운 술이란 뜻일까? 다다가 과천미주라는 이름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두털이가 말했다.

“미주는 쌀 술 아름다운 술 맛이 섬세한 술이라는 뜻이래.”


친구들은 람지가 준비한 음식 알밤스콘과 함께 과천미주를 맛있게 먹었다.

아주 잘어울렸다.


그날 모임이 아주 성공적이어서 람지는 제안했다.

“우리 주마다 같은 시간에 모여서 막걸리 마실래?”


취기가 살짝 오른 친구들은 모두 찬성이었다. 

“다음주에도? 계속? 좋아!”


모임은 숲속이 캄캄해져서야 끝났다. 람지의 집을 나서니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먼 길을 가야하는 두털이에게 다다가 다가갔다. 

“또 한참 가야겠네.”

“응, 앞으로 매주 올 거니까 잘 익혀둬야지.”

걱정 말라는 듯, 두털이가 싱긋 웃는다.

“괜찮으면 저 아랫골까지 같이 갈래?”

“아니야, 나 빨리 갈 거야. 땅속으로! 너는 하늘을 날아 가야지.”

두털이의 눈이 맑은 샘물처럼 빛났다. 조금 전 마신 과천미주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찔레꽃 향기가 나는 듯 했다. 혹시 이 향기는 두털이에게서 나는 거였을까? 다다가 킁킁 두털이에게 다가갔다. 깜짝 놀란 두털이가 물러섰다. 다다가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두털이 얼굴이 또 붉어졌다. 두털이가 짐짓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다다야, 너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 과천미주가 한 병 더 있어서. 여기! 그리고 나 이제 간다. 서둘러야해서!”

두털이가 과천미주를 다다 품에 떠밀더니 곧장 땅속으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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