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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문 Aug 05. 2023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시인의 식물도감

 내게 여름이란, 사계절 중 가장 자연을 사랑하게 되는 계절이다. 길가의 꽃 하나, 식물 하나조차도 사랑스러워보이고, 그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주는 계절. 그렇게 모든 식물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서, '인간 식물도감'이 되는 게 작은 소망이다.


붉고, 노랗고, 푸른 여름의 꽃들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꽃은 단연 능소화다. 평소에도 길을 걷다 능소화만 보이면 사진을 찍기 바빠서 핸드폰 갤러리에 능소화 사진이 한가득이다. 이 시집을 고른 이유도 '능소화'가 제목에 들어가서였다. 물론 긴 문장 형식의 제목이 꽤나 서정적이기도 했고.



식물도감

호박씨 한 알 묻었다
나는 대지의 곳간을 열기 위해
가까스로 땅에 열쇠를 꽂았다


펼친 꽃잎
접기 아까워
작약은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네


산수유 가지에 새가 앉았다가
골똘히 무슨 생각 하더니 날아간다
꽃 이름을 몰라서 갸웃거렸을까

새야,
다음에 올 때는 식물도감 들고 오너라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작약은 작약작약 비를 맞네'라는 귀여운 말장난에 웃음이 났다.

새에게 식물도감을 들고 오라는 농담조의 말투에선 마치 이웃집 어린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다정함이 느껴진다.


'식물도감'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면서 동시에 시집 전체를 마무리하는 문장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름에 얽매일 필요 없이 그저 꽃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삶의 태도에서 닮고 싶은 여유로움을 느꼈다.


호미

이 구부정한 도구로 못된 풀들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아이들을 키운 여자들이 있다


무빙 (霧氷)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 현상이다
중심과 변두리가 떼어져 있다가 하나로 밀착되는 기이한 연애의 방식이다
엉겨 붙었다는 말은 저속해서 당신의 온도에 맞추려는 지극한 정신의 끝이라고 해두자
멋조롱박딱정벌레가 무릎이 시리다는 기별을 보내올 것 같다
상강(霜降) 전이라도 옥양목 홑이불을 시쳐 보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울진 두붓집

뒤늦게 콩물과 비지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너의 아버지는 반듯했지만 물렁해서 일찍 늙는 것 같았다 하나 나는 죽어도 김이 오르는 두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눌러야 단단해지는 것이 어디 두부뿐이랴 보고 싶다는 말 참는 동안 때로 바다를 두부처럼 칼로 자를 줄도 알게 되었다


장마

창턱으로 뛰어든 빗방울의 발자국 몇개나 되나 헤아려 보자
천둥 번개 치면 소나기를 한 천오백근 끊어 와 볶는 중이라고 하자


'식물도감' 외에도 마음에 드는 시, 그 속에서도 마음을 울렸던 문장들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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