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단상] 축제의 비일상성과 찰나
축제 사무국에서 예술축제를 기획하고 운영한 적이 있었다. 고작 20, 21살 때의 일이었다.
또래들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시급을 받을 때 꽤 큰돈을 받았고, 전전해도 얻기 어려운 인턴 자리보다도 더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곤 경험을 쌓았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분명한 것은 축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기회이긴 했다.
祝祭: 祝(빌다, 기원하다 축) 祭(제사 제)
festival: 어원 라틴어 festivalis(성스러운 날)
어원에서 나타나는 바, 축제의 뿌리는 의례이자 종교적인 것이었다. 성스러운 존재나 힘과 만날 수 있게 하는 의사소통 수단이었던 것이다. 현대에선 이러한 신성성은 더 이상 발현되지도 시행되지도 않는다. 경제적, 상업적 영역에서 일시적으로 진행되는 행사의 의미가 커진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축제는 그냥 축제만으로 즐겁고 축제가 가진 성격은 여전히 판타지 같다.
비일상성
축제는 일상생활과 공간의 단절을 가져다준다. 일상과 다른, 흔히 접하지 못하는 사회의 장이며 이러한 축제적 상황은 일종의 카오스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순간을 리미날리티(limimality)단계라 칭한다. 사회적이고 일상적인 실체를 파괴하는 비일상성이 바로 축제의 본질이다. 비일상성은 일상에서는 불가했던 경험과 활동을 가능케하며 금기가 해체되는 장을 만든다.
사회 속 일원으로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녹녹지 않기에 우리는 늘 전환과 역전을 꿈꾼다.
고로 축제를 원한다는 것은 일상의 ‘단절’을 필요로 할 만큼 삶을 충실히 살아왔다는 반증과 같은 것이다.
축제가 가져다주는 ‘세속적인 것’, ‘일상’으로부터의 단절과 사회적 속박이나 억압으로부터의 일탈은 삶의 무게에 대한 염원과 같은 것이다.
찰나
비일상적 상황은 결코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오래 지속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리미날리티란 ‘문지방’을 의미하는 리멘(limen)에서 파생한 것으로 문지방에 서 있는 것과 같이 평소에도 금기로 여겨지는 공간이나 행위의 존재를 상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리미날리티 단계는 영원히 또는 장기간 지속되는 단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끝나는 단계이다. 이것은 결국 기존의 사회질서, 즉 코스모스적인 상황을 카오스적인 상황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축제의 정점은 ‘찰나’이다. 축제의 기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지나면 사라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간절해지고 소중해진다. 한편으로는 축제에 집중해도 괜찮다는, 일상을 잊고 비일상성을 꿈꿔도 된다는 안심을 준다. 축제의 ‘찰나’가 지나면 일상의 복귀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다. ‘찰나’의 순간을 통해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축제가 뭔지, 내가 선호하는지와 같은 고려도 없이 무작정 투입되어 일을 했다. 선 노동 후생각
축제를 준비하면서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하면서 일을 해댔다. 그럼에도 축제 일을 하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판타지를 사람들에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마치 판타지와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벌써 몇 년째 축제가 열리지 못하고 있다. 시작도 못하기도 하고, 열심히 준비한 것마저 취소되기 일수다. 축제를 준비한 예술가들과 수많은 스태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코로나가 어서 종식되어 함께 일상의 전환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