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방영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 속 장면에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여주인공이 아픈 남자를 위해 들깨죽과 함께 정성스럽게 과자를 만들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당시에는 과자 이름도 몰랐다.)
2022년. 제과를 배우고 다시 본 드라마 속에서는 삼순이가 만들던 그 과자가 '밀푀유'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밤새 뒤척인 여주인공이 새벽부터 만드는 과자가 밀푀유라니!
드라마 작가의 디저트에 대한 이해력에 감탄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속 밀푀유 만드는 장면 (자료출처: mbc)
밀푀유는 '천 겹의 잎사귀'라는 뜻으로, 밀가루 반죽을 여러 겹 겹쳐 만들어 바삭하게 구운 프랑스식 과자이다. '천 겹'이라는 단어에서 예상되듯 겹을 살려 파이를 만드는 과정은 까다롭고 고난한 작업의 연속이다.
겹을 살린 파이를 만들려면 버터와 밀가루 반죽을 겹치고 펴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이렇게 겹쳐진 수가 파이의 겹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최대한 버터가 녹지 않도록 작업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학원에서 밀푀유를 만들 때 제법 쌀쌀한 겨울이었음에도 난방을 끄고 창문까지 열어두고 작업을 했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만들 수 없어 단언컨대 이것을 선물 받는 사람은 만드는 이에게 소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드라마 속 삼순이가 밀푀유를 만들며 짓던 표정과 정성에서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파이를 굽는 과정 역시 무난하지 않다. 반죽을 평평하게 굽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골고루 구멍을 내줘야 한다.
오븐에 넣을 때도 무거운 철판을 얹어서 최대한 눌러주며 굽는데 이런 과정들을 소홀히 하면 파이가 울퉁불퉁해진다. 마지막으로 잘 구운 파이를 적당한 크기로 재단한다. 이때 힘 조절에 실패하면 파이를 자르는 도중 깨질 수 있으니 애써 만든 결과물이 깨지지 않을까 온몸의 신경을 손가락 끝에 집중하고 깔끔하게 잘라내야 한다.
파이를 굽는 동안 노른자, 설탕, 우유, 버터, 밀가루 등을 넣고 적당한 질감의 크림을 만들어 식혀둔다.
파이와 크림, 그리고 딸기처럼 크림에 잘 어울리는 과일을 층층이 쌓아주면 드디어 바삭하고 크리미한 밀푀유가 완성된다.
드라마를 보며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밀푀유를 받아 든 남자의 반응이었다.
'새벽부터 만든 밀푀유에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삼식이는 알까? 반의반이라도 알아주면 좋을 텐데!'
드디어 그녀가 남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공들여 준비한 것들을 들고 그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한참 후 현관문이 열렸다. '오~ 그것들을 받아든 삼식이는 얼마나 감동할까?'
삼식이가 현관 문을 열자 뒤이어 그의 전 여자친구가 함께 보인다.
'오! 세상에... 저런 녀석을 위해 새벽부터 그 고생을 하다니! 삼순이가 밀푀유를 어떻게 만들었는데!'
현실에서도 누군가를 위한 정성이나 마음이 상대에게 온전히 닿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드라마처럼 어이없는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준비한 사람의 과정이나 노력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경우도 그럴 것이다. 만약 내가 선물한 밀푀유가 저만큼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지 모르는 친구에게 선물한다면 받는 이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주는 이와 받는 사람의 정보의 불균형을 맞춰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준비한 사람의 마음과 과정을 알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거나 모르는 척하는 경우도 있다. 돌이켜보면 시어머니에게 여러 번 내가 그랬다.
시어머니는 직장에 다니는 바쁜 며느리를 생각해 철마다 정기구독처럼 산이며 들에서 나오는 제철 음식을 알뜰히 챙겨 보내셨다. 시골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은 택배로 보내면 깨질까 여러 겹 신문지로 싸말아 보내셨고, 냉이, 달래가 나는 철에는 손톱 밑이 까맣게 되도록 깨끗하게 다듬어 보내셨다. 알알이 깨지기 쉬운 산딸기도 과일 포장 용기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차곡차곡 넣어 곱게 보내주셨다.
택배로 보낸 달걀은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배송 도중 번번이 깨져서 도착했고, 엉망이 된 박스를 치우며
나는 감사한 마음보다 달걀을 택배로 보내셨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들에 널린 산딸기를 그만큼 모으려면 얼마나 허리를 구부려 따고 손질하셨을지 알면서, 뜨거운 날씨에 과육이 다 무르고 터져서 버리는 게 많으니 다음부터 보내지 말라는 말씀이 먼저 나간 적도 있다.
어머니가 준비하신 과정이 눈에 보듯 선하고 하나라도 더 보내려 눌러 담으시는 마음을 잘 알면서도 감사하다는 인사보다 그만 보내시라는 말씀이 앞서 나가며 어머니 마음을 모른 척 한 적도 있었다.
드라마 속 삼식이를 비난하다 지금껏 내가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왔는지 돌아보니 나는 그를 나무랄 자격이 없다. 선물을 전할 때 전하는 이의 정성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받아든 사람도 최선을 다해 감동해야 선물이 가지는 의미가 온전히 완결된다. 선물 그것 자체의 가치만 보지 않고 그것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과 과정 속 정성도 함께 읽어낼 줄 알아야 선물 받을 자격이 있고, 선물은 그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