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오늘 나한테 이상한 거 많이 물어봐 줘서 고마워.
나 솔직히 얘기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
친구들을 만나도 다 솔직하지 못하더라.
대화도 하고 섹스하고 그러려고 사랑하는 거 아니냐?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렵냐.
우리 비싼 척 작작하자. 사실 다들 외롭잖아. X발…
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 ‘자영’의 말
“코로나 시국이잖아. 자연스럽게 남자를 만날 일이 없어.”
친한 동생 S가 ‘틴더로 남자 만난 이야기’를 했다. 미니홈피 시절부터 만난 남자와 연애하다 결혼한 내게 데이팅 앱은 그야말로 딴 세상 이야기. 귀가 쫑긋했다.
그 시절 ‘벙개’와 비슷하려나? 아니지, 벙개는 사진과 취미와 이상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기껏 해야 사는 곳과 나이와 성별을 밝혔지. 홍대, 20살, 여, 이런 식으로. 그렇게 자기소개를 한 뒤 만남에서 중요한 정보 몇 가지를 교류한(친구랑 있어? 몇 명? 밥은 먹었고? 술은 어때? 너 이쁘냐? 네 친구는 이쁘냐? 등) 후 접선 장소를 정했다. 그 시절의 낭만이라면 주고받는 텍스트 속에서 상대의 목소리와 얼굴을 상상했다는 것. 하지만 그 낭만은 때때로(생각보다 많이) 엄청난 실망을 안겨 주었다. 약속 장소 코앞에서 ‘설마?’, ‘하필?’, ‘말도 안 돼!” 인식의 3단계를 거쳐 뒷걸음질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그렇다.
데이팅 앱을 쓰는 사람들 다수가 그러하듯, S도 처음엔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데이트 상대를 찾아야 하나 회의적이었다. 원나잇 하는 애들이나 쓰는 거 아냐? 어떤 인간이 나올 줄 알고? 하지만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다 돌아온 친구를 보니 데이팅 앱은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동네에서든 낯선 여행지에서든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실행시키는.
하긴, 수년 전 ‘커피 미츠 베이글(Coffee Meets Bagle)’이라는 빵집 이름 같은 데이팅 앱을 알게 된 것도 한 뉴요커 때문이었다. “뉴욕에선 좀 더 진지한 만남을 원하는 여성들이 많이 사용해요. 정오마다 ‘베이글(엄선된 상대)’을 배달해 주는 콘셉트로 매칭을 시키는데, 다른 앱보다 여성 친화적이에요. 알고 보니 한국계 자매들이 만든 앱이더라고요.” 그 뉴요커는 한 ‘베이글’과 어느 주말 오후 4시, 카페에서 처음 만났고, 현재는 한 집에 살고 있다.
‘자만추’는 커녕 있던 기존 인간관계도 휘청대는 코시국. S는 예전에 깔았다 지운 ‘틴더’를 다시 깔았다. 그리고 스와이프 시작. 매칭된 남자들과 대화도 열심히 했다. “한 일주일 정도 얘기하다가 괜찮다 싶으면 톡으로 옮기는 거지.” 톡이라니? 전화번호 알려주고 그래도 돼? 내 질문에 S는 한숨부터 쉬었다. “언니! 아이디만 공유하는 거지. 요즘이 어떤 시댄데…” 그러니까, 나도 요즘 시대가 하 수상하여 걱정이 됐구나…(망할 년)! 도토리 구하러 산으로 갈 채비했던 미니홈피 시절의 ‘옛날 사람’처럼 무안했다.
“나도 알아! 나도 ‘당근’ 거래할 때 챗으로만 해. 요즘이 어떤 시댄데 전화번호를 막 알려주고 그러니?” 비혼의 틴더 만남 이야기에, 당근 거래로 공감(하는 척)하는 기혼이라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겠지만,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M세대 꼬리칸이 나를 원시인 취급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틴더와 당근 사이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첫째,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앱을 깐다. 둘째, 막상 들어가면 내가 꼴찌인가 싶을 정도로 이용자가 많다. 셋째, 관심 목록을 작성하는 것만으로 ‘뭔가 하는’ 기분이 든다(장바구니 놀이와 흡사하다). 넷째, 상대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꽤 초조하다… 그만할까?
“하긴 당근도 요즘 웬만하면 택배로 거래해. 대면 거래만의 즐거움이 있는데 말이야. 한 번은 차량용 방향제를 샀는데, 판매자가 “환하게 웃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어요”라고 후기를 남긴 거야. 그게 뭐라고 엄청 기분이 좋더라니까?” S는 계속되는 당근 토크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자꾸 당근 얘기야?” 왜긴, 코로나 시국에 나도 사람이 그리워 그러지.
S는 그중 이야기가 잘 통하는 몇 사람과 대면 만남을 가졌다. 1호는 비슷한 직업군의 남자였다. 난 또 말을 자르고 물었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S가 언니만 아니면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10대야? 죄짓는 것도 아니고 사람 사귀러 나간 건데 뭐가 문제야?” 내가 꽉 막힌 건가? 난 중간에 아는 사람 있거나 애매하게 아는 사이는 부담스럽던데. 당근만 해도(!) 그렇다. 판매자가 나와 같은 동네일 경우 걱정이 앞선다. 같은 아파트 사람이면 어쩌지? 만나서 거래를 하는 것부터 곤욕이다. 혹시 그 사람한테 산 무언가를 걸치고 나갔다가 마주친다면?
1호는 퇴근길에 만나 술을 마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문자로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말투가 거슬렸다고 한다. 뭐야, 벙개랑 크게 다르지 않잖아? 반면 2호는 첫 만남부터 맘에 들었다. “만나기 전에 흡연자인지 묻더라고. 그렇다니까 뭘 피우는지 또 묻는 거야. ‘아이코스’ 피운다고 했지?” 그리고 디데이. 옆 동네 사는 2호가 낮에 커피나 한 잔 하자면서 본인 동네의 커피빈에서 만나자고 했다. S가 대형 카페는 우리 동네에도 많다고 하자 2호는 간곡한 청인 듯 말했다. “저 한 번만 믿고 와주면 안 될까요?”
별 거 없기만 해 봐, 하는 심산으로 도착한 커피빈. 먼저 도착한 2호가 맞아준 곳은 매장 2층 ‘전자담배 흡연구역’이었다. S는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나 이날 ‘전담’존 처음 봤잖아!” 커피와 담배로 시작하는 애연가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것도 담배 냄새가 몸에 배지 않는(궐련형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 다수가 연초 냄새가 몸에 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자담배 전용구역이라니. 애주가로 치면 내 취향을 저격하는 술집에 나를 안내한 상황. 20년 전 잠실 포장마차에서 ‘꼼장어 볶음’을 사주던 그 남자, 잘 있으려나?
센스 있는 접선 장소로 첫인상 점수를 높게 받은 남자 2호. 이어지는 대면 대화 역시 즐거웠다. 카페를 나와 맥주를 마셨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영업시간 제한이 아쉬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둘은 어떻게 됐냐고?
여기서 김이 좀 빠지는데, 이게 한 달 전 얘기다. 그 후 S와 남자 2호는 동네 친구인 듯 사이버 러버인 듯 동네 친구 같은 사이로 종종 보고 있다. 첫 만남의 임팩트와 달리 영화에서 보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애 빠진 로맨스> 속 ‘함자영’과 ‘박우리’처럼, 데이팅 앱에서 만나 밥 먹고 술 마시고 연애 상담도 하고 섹스도 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S가 ‘틴더로 남자 만난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동네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틴더의 광고는 뻥이 아니었다. 목적이 동네 친구 사귀기가 아니었대도 이렇게 동네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개팅 상대가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주는 것처럼.
둘째, 비혼의 틴더 라이프와 기혼의 당근 라이프는 생각보다 더 유사하다. 당근에는 지역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동네 생활’ 기능이 있는데, 이걸 활용하면 나도 동네 친구를 사귈 수 있다. 동네 생활 게시판을 보면 함께 반려동물을 산책시킬 사람은 물론 마트에서 산 재료를 나누거나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을 구한다는 글도 올라오니까.
… 이제 진짜 그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