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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Apr 08. 2022

커플 요금제 해지란 연애의 끝

싸이부터 인스타까지, 헤어지면 끊어야지?


<섹스 앤 더 4티> 6화 


싸이의 추억

그 새끼의 이별 통보는 야비했다. 사귀자 하고 첫 달은 세상 로맨티시스트였던 그는 다음 달은 세상 모든 불행을 끌어안고 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어느 날 카페로 불러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라고 했다. 지금 누군가와 만날 여유가 없다고. 어쩜 그렇게 개인 사정이 한두 달 사이에 급변하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 남자가 좋았던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생각이 정리되면 이야기해달라고. 그렇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린 거였다. 사실은 이제 내가 지겨워졌다는 말을, 자신의 집안 상황과 취업 준비와 기타 등등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사를 전부 끌어와 혼자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그. 새. 끼.


자꾸 그 새끼, 그 새끼 해서 불편할 수 있는데, 이렇게 욕하는 이유부터 밝히겠다. 그 새끼는 나와 헤어지고 세 달 뒤 나의 '친한' 친구와 사귀었다! 도저히 누군가를 만날 수 없다던 상황이 놀랍게도 세 달 사이 정리가 된 것이다... 이러니 욕이 안 나와?


어쨌거나 둘 다 '생각할 시간'을 보내는 거지, 일방적으로 차인 것은 아니라던 나의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장창 깨졌다. 지인 중 한 사람이 메신저(MSN? 네이트온?)로 물어왔다. "너네 헤어졌어?"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하기도 애매했던 나는 왜 그렇게 묻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싸이 보니까 그런 것 같아서..." 싸이? 남들 다 보는 미니홈피에 뭐라고 썼기에 우리가 헤어졌다고 70% 이상 확신을 가진 질문을 해?


심장이 뛰었다. 바로 싸이월드에 접속해 그의 미니홈피를 '방문'했다. '대문' 화면에 그의 '아바타'가 샤워기 밑에서 등 돌린 채 똥폼을 잡고 있었다. 멘트가 뭐였더라, '미안해'였던가? 미안해? 뭐가 미안해? 사귀자고 했다가 금방 질린 게 미안해? 같이 종로 YBM 토익 수업 듣다가 잠적해서 ("나 안 갈 테니까 너 들어"라고 말은 했지만) 학원비를 날리게 한 게 미안해? 아니다, 미안한 대상이 내가 아닐 수도 있지. 나랑 사귀기 직전에 헤어진 전 여친한테 미안해(네 덕에 나는 전 여친 친구들한테 '세상 나쁜 년'이 되었다고!)? 아니면 근미래까지 내다보는 예지력이라도 있었나? 내가 정말 믿고 의지하던 친구와 사귈 걸 미리 사과한 거니? 아니, 애초에 미안할 짓을 왜 하니, 이 @#$새끼야!   



인스타 스토리, 나만 안 보여?

20대 초반인 조카 E의 '첫 연애'가 끝났다. 오빠와 새언니가 치를 떨며 보기 싫어하던 커플링이 보이지 않았다. 조카는 무덤덤했고, 나는 축하했다. 그래, 100세 시대에 100명은 만나봐야지. 조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애들의 이별 후가 궁금해진 나는 전 남친과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SNS로 안부 정도는 알고 있다고 했다. "너 좀 쿨하다?" 조카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모르는 근황을 친구들한테 전해 들으면 짜증이 난다고 했다. SNS도 안 끊었다면서, 너의 친구들과 너의 정보량은 왜 차이가 나는 거지?


문제는 역시나 SNS였다. 나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친한 친구'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친한 친구가 전 남친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뭘 올렸다고 하는데 자신은 보이지 않았다며, 그 순간 자신은 전 남친의 '친한 친구'에서 제명된 것을 알았다고 했다. 기분이 더러웠다고. 응, 그 기분 나도 잘 알지!



커플 요금제 해지에 동의하십니까

21세기 초. 그 시절 1010235(열렬히 사모)하던 커플들은 커플링만큼이나 커플 요금제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커플링도 커플요금제도 하지 않았다. 커플링은 족쇄 같았고, 커플 요금제는 번거로웠다. 스무 살에 100일을 기념해 커플링을 맞추자던 남자 친구에게, 그 돈으로 술과 고기나 왕창 먹자고 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도 친한 남사친을 불러 (100일 따윈 잊은 채) 밤새 술을 마셨다(미안, 잘 지내지?). 내 기억에 커플 요금제는 같은 통신사끼리 신청이 가능했는데, 전화기가 뜨거워질 정도로 통화한 남자 중 같은 통신사를 쓰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같이 핸드폰 대리점에 가서 신청하는 과정이 귀찮았던 것 같기도 하다.


과몰입해서 보던 드라마 <스다스하>의 엔딩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안도했다. 그래, 커플 요금제를 안 한 건 신의 한 수였어! 나희도와 백이진의 무지갯빛 사랑은 결국 끝나버렸는데, 이별 후 두 사람은 핸드폰 대리점에서 어색하게 재회한다. 절대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백이진과의 이별처럼, 어묵탕 국물에 퐁당 빠지며 명을 달리 한 핸드폰을 보며 절규하던 나희도. 그는 최신 핸드폰이나 지르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려고 한다. 그런데 대리점 사장님이 번호를 조회하다 말고 묻는 거다. 커플 요금제를 유지할지, 해지할지. 이 사랑이 영원할 거라 생각할 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별 후의 처참한 정리 과정이었다. 해지해 달라고 하지만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 그렇게 호출된 백이진 역시 참담하기는 마찬가지다. 대리점 사장님은 <사랑과 전쟁>의 신구 선생님처럼 4주간의 '생각할' 시간을 줄지 묻지만 둘은 결국 커플 요금제를 해지한다.


남편과 연애할 당시 커플링도 커플 요금제도 관심 없어하는 남자에게 약이 올라 툴툴댄 적이 있다. "우리는 헤어지면 참 깔끔해서 좋아. 커플링이 있어, 커플 요금제를 했어?" 그런데 웬 걸, 이 남자가 조용히 웃으며 펀치를 날렸다. "우리 사이엔, '빚'이 있지." 그랬다. 남자 친구와 나 사이엔 채무가 있었다. 나의 월세방 보증금의 일부가 그의 돈이었던 것.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를 질렀다 "완전 치사해!" 커플링도 아니고, 커플 요금제도 아니고. 이별 후 정리할 게 빚이라니. 퍽이나 낭만적이었다.


보증금의 일부였던 그 빚은 이후 반지 두 개가 되었다. 결혼의 족쇄, 예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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