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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Apr 26. 2022

니가 가라, 오사카

먹고 자빠지고 사랑하라!

<섹스 앤 더 4티> 7화



"주말에 여행이나 갈래?"


얼마 전 '미경이(본명 아님 주의, '프롤로그: 마흔 살 미경이'  참고)'가 물었다. 한동안 소처럼 일하더니 이달 주말은 쉴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얼마만의 주 5일제 근무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못 갈 상황이었다. 잠잘 시간도 부족해 돈 쓸 시간은 더 없던 1인 가장은 당장 이번 주말에 '국제선 항공'을 타고 싶은 눈치였다.


오사카 가서 라멘 한 그릇, 어때?  


오사카라, 좋지. 한일 무역분쟁 이후 마음에서 지운 여행지지만, 우리의 오사카 여행은 아름다웠잖아? 어쨌거나 난 안 돼. 아직 답답한 양국 관계와 훅 떨어진 배우자의 체력, 빈약한 자금 상황과 기타 등등 문제를 다 제쳐두더라도, 여권이 만료 됐거든.  





나의 해외여행은 3년 전, 미경이와 함께 간 오사카가 마지막이었다. 당시 행선지를 정하는 데 8할의 영감을 준 건 박찬일 셰프의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 기꺼이 서서 마실 체력은 없었지만, 앉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마셨다.


첫째 날 저녁. 유명한 오코노미야키 집에서 기분 좋게 시작해 한국어 메뉴판이 따로 없던 쿠시카츠(꼬치 튀김) 전문점에서 제대로 흥이 오른 우리는 3차 장소는 즉흥적으로 선택하기로 했다. 골목골목이 작은 술집들로 빼곡한 오사카에 왔으니 그 정도 모험은 즐기자고, 아니다 싶으면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골목을 빠르게 스캔하며 여행 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고수의 술집을 찾기 위해 육감을 총동원하고 있는데, 이런 일에 잘 나서지 않는 미경이가 웬일로 한 술집을 가리켰다. 젊은 남자 사장이 혼자 운영하는 3평 남짓한 술집이었다.


뭐라 토를 달 새도 없이 박력 있게 앞장 서던 미경이. 자리에 앉아 생맥주 두 잔을 주문한 다음에야 이 가게를 선택한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사장님이랑 눈이 마주쳤어."   


그게 다야? 아니지, 자신의 주방에서 열심히 일하는 남자(얼마나 섹시해?)와 눈이 마주쳤는데 느낌이 팍 왔다는 거잖아? 이보다 강력한 이유는 없지, 아무렴. 미경이와 눈이 마주친 사장은 추정 나이 30대 초중반, 가수 존 박을 닮은 외모였다.


한 명의 오너 셰프가 가게 안을 지휘하는 ㄷ자형 바의 술집.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창피하지만, 그날 낯선 도시에서 취기가 꽤 오른 우리는 존 박 닮은 사장님을 동네 단골 술집 사장님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드라마 <심야식당>의 손님들처럼, 뭔가를 주문할 때마다 "마스타~"를 찾으면서.


그곳에서 나는 일본인에 대한 두 가지 선입견을 깼다.  


첫째, (모든) 일본인은 식사 시 개인위생에 철저하다. 개인 접시와 공용 국자는 필수, 함께 먹는 음식에 개인 수저를 사용하는 것은 결례다.


그런데 이날 내 옆자리에 앉은 여성은 지금 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친절을 내게 베풀었다. 그가 주문한 '달걀밥'의 맛이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무려 '첫 숟갈'을 내 입에 넣어준 것! 몇 번을 사양하다 결국 받아먹은 달걀밥은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맛이었다. 나는 '마스타'를 불러 숟가락을 하나 더 달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으나, 그는 내 입에 넣었던 숟가락으로 나머지 밥을 맛있게 먹었다.


둘째, (모든) 일본인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 술집엔 내부 화장실이 있었는데, 협소한 공간 탓에 가는 과정이 험난했다. 출입구와 반대편 구석에 자리한 화장실에 가려면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자리의 손님들에게 '스미마셍'을 반복하며 의자를 앞으로 당겨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게다가 화장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밀가루 포대를 비롯한 가게의 잡동사니들이 잔뜩. 겨우 볼 일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오던 길, 나는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넘어져서 손님 중 누군가를 밀치는 상황을 피하려다 옆으로 장렬하게.


그때가 내 인생의 소소한 불행 중 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건 하필 목소리가 가장 큰 남자 손님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는 좀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세 번이나 물었다. "다이조브데쓰까(번역: 괜찮아)? 다이조브데쓰까(번역: 안 괜찮지)? 다이조브데쓰까(번역: 쪽 팔릴 텐데)?" 귀가 쩌렁쩌렁 울리는 그 질문을 막는 방법은 최대한 빨리 몸을 일으켜서 대답하는 것밖에 없었다. "다이조브데쓰...(번역: 조용히 해, 이 XX야)" 그는 나의 무사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의미인지 술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저걸 그냥 확...     


그 시각 미경이는 뭘 하고 있었냐고? 다정한 친구는 놀랍게도 내가 넘어진 사실을 전혀 몰랐다. 우리 자리가 출입구 옆이긴 했지만, 그래 봤자 화장실과 2m 떨어진 곳이었는데. 극동 아시아에선 보기 드문 '태양인' 체형의 절친이 '날 좀 보소' 몸짓으로 크게 자빠지고, 확성기를 삶아먹은 남자가 앰뷸런스 데시벨로 "다이조브데쓰까?!"를 연달아 외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 쪽으로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대화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누구와?


상대가 존 박 닮은 사장이었다면 이렇게 몇 년이 지나 내 친구를 고발하는 글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 딸린 친구와 놀아주느라 1박 2일 같은 2박 3일(!) 여행을 함께 가 준 고마운 친구니까. 그날 미경이는 존 박 닮은 사장에게 "가게를 새벽 3시에 닫는다"라는 고급 정보를 입수한 뒤 30분에 한 번씩 내게 말했다. "친구야, 먼저 가도 돼."


진심으로 숙소에 먼저 가(주)고 싶었지만, 한 가지가 맘에 걸렸다. 우리 미경이는 만취하면 두 발로 못 걷는다는 사실. 사랑하는 친구의 안전한 숙소 복귀를 위해 나는 기꺼이 청춘사업의 '걸림돌'이 되었다. 어느 순간 미경이는 왼편에 앉은 사장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내게 등을 돌렸다. 그런다고 먼저 들어갈 내가 아니지. 덕분에 달걀밥을 준 K팝 팬과 친구가 되었으니까.  


오사카 사람은 부산 사람 같다더니, 그날 밤 그곳은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의 어느 술집 같았다. 모두가 친구가 되고, 무엇이든 낭만이 되는 분위기.


하지만 낯선 여행지의 들뜨는 낭만도 새벽 2시쯤 되니 피로를 이기지 못했다. 메뉴판에 있는 모든 안주를 섭렵하고, 목까지 찰랑찰랑하게 맥주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3시는 오지 않았다. 미경이는 사장 친구들의 직업을 다 알게 될 정도로(한 명은 개그맨이라고 했던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정작 사장과는 사적인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계산 전에 마지막으로 "나 먼저 갈까?"라고 물어봤지만 미경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닌 것 같지? 내가 봐도 아니다.


3년 뒤. 썸은 없었지만 술은 그득했던 2박 3일의 오사카 여행을 곱씹으며 우리는 방구석에서 술을 마셨다.


혼자라도 오사카에 가서 라멘 한 그릇 하려 했던 미경이는 결국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티켓 값이 너무 비쌌다. 오사카 왕복 편이 무려 60만 원 대. 3년 전보다 2배 이상 뛴 가격이었다. 우리는 '뉴 노멀'이 아닌 '리얼 노멀' 시대가 오면 다시 여행을 계획하기로 했다.  


그날까지, 당분간은 소처럼 일하는 수밖에.  


+ 술도녀를 위한 실용 일본어 : 오사카 선술집에서 주구장창 사용한 각자의 한 문장    

- 미경이는 애연가다

"하이자라 구다사이" = "재떨이 좀 주세요."

- 나는 잔술로 마시는 냉사케를 좋아한다.

"이빠이 구다사이." = "두 잔 같은 한 잔 주세요(!)"


+ 술도녀를 위한 일본의 술 문화 안내

못키리: 잔술로 사케를 마실 때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주는 문화. 유리잔을 채우고 넘친 술이 마쓰잔(유리잔을 받치는 편백나무로 만든 잔)에 담긴다. 마쓰잔에 담긴 술을 다시 유리잔에 따라 마시면, 기분이 조크등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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