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라면은 간다.
“<재벌집 막내아들> 같이 볼래?”
썸남인 듯 썸남 아닌 썸남 같은 너. R은 남자의 톡을 받고 설레면서도 혼란스러웠다. 클럽에서 만나 “헤이 걸, 우리 집으로 가자”라고 했다면, 집 앞에 찾아와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라고 했다면 헷갈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주말 밤 10시 30분에 시작하는 드라마를, 자신의 집에서 보자는 이 제안은 어떤가?
R은 톡방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거 ‘라면 먹고 갈래’ 맞아?
A: 100%지! 드라마 끝나면 12시인데, 그때부터 뭐 할 건데?
B: 둘만의 드라마를 찍자, 청불로다가?
C: 드라마 덕후는 아니겠지? 왜, 오디션 프로그램 같이 보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잖아?
B: 그렇다고 애매한 사이에 집으로 불러?
C: 근데 왜 하필 재벌집 막내아들이야? 공포영화도 아니고, 멜로도 아니고?
A: 지금 뭘 보는지가 중요해? R이 연애하게 생겼는데?
섹스 앤 더 4티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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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연애가 내 연애(보다 꿀잼)인 여자들 사이에서, 친구의 썸만큼 중차대한 문제는 없는 법.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와 친구들의 대화를 떠올리면 대충 감이 올 것이다. 덕선에게 다정하게 인사하는 남사친을 보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도사님’처럼 말하던 친구들 말이다. “덕선아, 축하해. 너 남자친구 생겼어.”
라면 먹고 갈래? 넷플릭스 보고 갈래(Netflix and Chill)? 재벌집 막내아들 보면서 라면 먹을래…? 흠, 나 같으면 “SNL 보고 갈래?”라고 물을 것이다. 혹시 장윤주 편 ‘상여자 특’ 봤어? 너 내 왕자 해라!
덕선이, 아니 R과 친구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주말을 기다렸다. 송중기의 목숨이 풍전등화였지만, 드라마 전개 따위는 뒷전이었다. 지금 무엇보다도 궁금한 건 드라마가 끝난 뒤, TV 앞에 앉은 현실남녀의 전개. 드라마가 눈에 들어오겠어? 나중에 넷플릭스로 봐!
하지만 우리 집으로 오라던 그날. 남자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무소식이었다. 달력에 X만 치지 않았을 뿐 주말만 기다리고 있던 R은 힘이 쭉 빠졌다.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말인가? 언제 밥 한 번 먹자 같은 한국식 인사? 말도 안 돼, 주말 밤에 자기 집에서 드라마 보자는 인사가 어디 있어?
돌이켜 보니 남자는 늘 이런 식이었다. 불쑥 연락해 조금 설레게 만났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패턴. 우린 결국 썸 아닌 쌈이었니? 허무하기는 덕선이, 아니 R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뭐였을까, 그 남자의 진심은?
어쩌다 ‘으른 연애’의 작업 멘트가 된 <봄날은 간다>의 “라면 먹을래요?”는 20년이 지나 “고양이 보러 갈래요?”에 밀리는 분위기다. 밀릴 수밖에, 인간이 고양이를 어떻게 이겨? 그 눈망울에 넘어가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슈렉> 시리즈의 스핀오프인 <장화 신은 고양이>가 2편까지 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별 보러 가자’는 말의 목적지는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가 아니지만, ‘고양이 보러 가자’는 말의 목적지는 고양이가 사는 ‘우리 집’. 솔로 친구들은 고민에 빠졌다. 고양이를 보러 가, 말아?
C는 보러 갔다. 식사 시간을 피해 카페에서 처음 만난 남자. 대화는 적당히 즐거웠다. 두 시간쯤 지나자 커피는 바닥이 났고, 엉덩이가 아팠다. 이 남자를 다시 만날 확률은 대략 30~40%? 애매했다. 하트를 누르기도, 스킵을 하기도.
상대의 애매한 분위기를 눈치챈 남자는 히든카드를 꺼냈다. 데이팅앱 프로필에서도 봤던 반려묘 사진. 앨범의 6할을 차지하는 사진들이 슬라이드 쇼로 펼쳐졌다. “우리 집에 고양이 보러 갈래요?”
순전히 고양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양이도 보고 싶었지만, 고양이를 돌보는 남자도 궁금했다. 그즈음 C가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온앤오프가 확실했다. 분명 사회에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사람이었건만, 집에서는 퀴퀴한 몰골로 한겨울 곰처럼 잠만 잤다. 가끔 코 아래 손을 갖다 대봐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고양이 집사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자신보다 작고 약한 생명체를 돌보는 사람이라면? 그나저나 고양이는 정말 있는 거겠지? 귀에다 대고 야옹(!) 하기만 해 봐.
다행히 고양이는 진짜 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여웠다. 하지만 그 집엔 다시 가지 않았다. 고양이’는’ 정말 예쁘네요, 그럼 전 이만.
반려묘 어필은 매우 강력하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 사진에 슬쩍 넘어가준 C와 달리 Y는 뒤로 넘어갔다.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는 진행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커피를 마시러 가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사는 오피스텔. 집에서 가지고 나올 것이 있다고 했다. 갑자기? 황당했지만 일단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핸드폰 사진을 들이밀었다.
“우리 집에 고양이 있는데, 보러 갈래요?”
여태 이 방법으로 실패한 적 없는 게 분명한 남자. 하지만 Y의 반응은 반전이었다. 주선자를 생각해 좀 전까지 예의를 갖췄던 Y는 질색팔색 하며 소리쳤다. “아니요, 절대 싫어요!”
Y는 고양이 공포증이 있었다.
<봄날은 간다>에서 “라면 먹을래요?”라는 말로 상우(유지태 분)를 집에 초대한 은수(이영애 분)는 라면 봉지를 뜯다 말고 묻는다. “자고 갈래요?” 은수의 표현은 직진이었다.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나무늘보 속도로 먹는다거나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운전 못할 핑계를 만들지 않았다.
같이 밤을 보내고 싶다는 떨리는 제안. 하지만 봄날은 가고, 사랑은 짜게 식는다. 은수는 상우의 말을 자르며 라면’이나’ 끓이라고 하고, 상우는 폭발한다.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 조심해!” 열정이 식은 관계에서 라면은 그저 만만한, 밥이 지겨울 때 생각나는 인스턴트식품. 실연 후 소주 안주가 되는 게 라면의 숙명이다.
2001년에 개봉한 영화의 대사 한 마디는 작업 멘트의 고전이 되었다. 이제 라면은 지겹고, 바다는 진부하다.
바다 보러 가자는 제안이 뻔하지 않은 건 <술꾼 도시 여자들>의 지연이(한선화 분) 정도? 그린 라이트 상대에게 “바다 보러 갈래요?”라고 선공하는 우리 지연이 말이다. “그 바다 맞아요. 파도도 있고, 등대도 있고, 모텔도 있고...”
부모 세대부터 찾았을 바다는 어느 순간 넷플릭스가 되고, 별이 되고, 고양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라면은 무엇으로 바꿀까?
근래 들은 라면 대체품 중 가장 구미가 당기는 메뉴는 W가 먹은 (떠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짠 안주에 술을 마시다 보면 당기는 그것, 차갑고 부드럽고 달콤한 그것!
첫 데이트에서 기분 좋게 취한 두 사람. 이자까야 앞에서 둘은 뭉그적거렸다. 니 맘도 내 맘도 이대로 헤어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 아까부터 좀 귀여워 보인 남자가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으로 물었다. “집에 가서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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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지금 연애 중이다.
사진 <봄날은 간다>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