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추가 그 자만추가 아냐?
이토록 뛰는 가슴
그때는 몰랐었네
내 마음에 꿈을 심은
환상의 아라비안 나이트
- 김준선 ‘아라비안 나이트’(1993)
벌써 20년 전 얘기다. 당시에는 아랍풍의 모텔들이 많았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밤이 되면 교회 십자가만큼이나 많이 보이는 이슬람st 건축물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이 나라는 크리스천만큼 무슬림이 많은 건가?
왜 아랍풍 외관의 모텔들이 많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곳에서 절대 끝나지 않을 천일야화라도 쓰라는 그런 깊은 의미? 눈에 확 띄는 외관이긴 했다. 양파 모양 돔 지붕을 보고 이슬람 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친구 Y집 앞에도 영화 <알라딘> 세트 같은 건물이 있었다. Y의 집에서 잔 다음날, 우리는 조금 멍한 상태로 버스정류장에 서서 그 건물을 봤다. 옥상부터 내려온 커다란 플래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대실 2만 원, 숙박 4만 원.
갑자기 Y가 물었다. “대실이 왜 더 싸?”
당최 질문의 뜻을 알 수 없어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Y가 다시 물었다. “큰방이 왜 더 싸?”
우수한 학업 성적에 비해 ‘깨는’ 소리를 잘하는 Y였지만, 그 질문은 우리 사이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번 같이 목욕을 한 사이였고, 더 이상 등을 돌리고 옷을 벗거나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탕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 친구들 사이에선 말 그대로 볼 꼴 안 볼 꼴 다 본 사이란 의미. 우리는 술 먹고 진실게임 하면서 남자친구와 어디까지 갔는지 캐묻는 단계를 넘어선 사이였다(그땐 그게 우정의 척도와도 같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게 ‘대실’의 의미를 묻네? 너 지금 내 앞에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거야? 우리 사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어?
나는 몇 년간 쌓은 우정의 모래성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그런데 정말 모르는 표정. 진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다행히 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실을 몰랐다고 했지, 안 했단 말은 아니었으므로.
그날 우리는 각자 하나씩 배웠다. Y는 대실의 ‘대’ 자가 큰 대(大) 자가 아니란 것을, 나는 Y가 대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쉬었다 갈래요?”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잠시 숙박 업소에 들러 침대에 허리 한 번 펴고 나오자고 ‘직역’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10년 전 A는 그랬다.
이번엔 느낌이 좋았는데, 정말 괜찮았는데, 또 썸만 타다 끝나버린 관계. A는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멜로가 미스터리로 끝난 상황. 이럴 땐 영화처럼 두 사람의 서사를 쭈욱 따라가며 실마리를 찾는 방법이 최고다. 수사 모드로 심각하게 듣던 나와 남사친 G는 마침내 마지막 만남에서 결정적 단서를 찾았다.
그 밤, 두 사람은 모텔에 갔다. 모텔’까지’ 갔다고 해야 하나?
막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고, 더 마시자니 눈이 감기는 상황. 남자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데 술을 더 마시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제안.
“우리 어디 가서 좀 쉴까요?”
그가 조금 더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제안했다면 아마 A는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A는 그저 시끌벅적한 술집을 벗어나 호감 가는 이 남자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을 뿐이니까. 믿기 힘들다고? 흠, 20년 넘게 지켜본 바 그때나 지금이나 진심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입실 후 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시간들을 보내다 어색하게 퇴실했다.
동상이몽의 대실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제부터 MZ 얘기다. 친한 동생 M이 연애를 시작했다. 죽이 잘 맞던 회사 동료와의 썸을 끝내고 연애 시작. 빛이 나는 주변 솔로들이 실상은 핑크빛 썸만 타다 잿빛으로 끝나는 얘기만 듣다 보니 연애한 지 막 100일이 넘었다는 소식에 내가 다 설렜다. 그래서, 어떻게 사귀게 된 건데?
“먼저 잤어요.”
아… 나 알아, 그거. 선섹후사. 선 섹스 후 사랑, 알고 말고.
우리 때라고 선섹후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런 과정을 규정할 단어가 없었을 뿐.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어쩌다 하룻밤을 보낸 남녀가 결국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들이 쏟아졌지만, 현실은 달랐다. 어떻게 사귀었냐는 질문에 어쩌다 하룻밤 잤다고 말하는 건, 어딘가 로맨틱하지 않았다. 먼저 잤… 어허!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자만추’. 요즘 애들이 쓴다는 이 줄임말 신조어를 배운(!) 게 불과 5년 전이다. 그런데 <마녀사냥 2022>를 보다 알게 된 사실 하나. 요즘 자만추는 그 자만추가 아니었다.
신동엽이 MZ 세대들의 연애 패턴을 묻자 비비는 (자신이 MZ세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 지인들의 사례를 봤을 때)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섹스하고 연애 시작’과 ‘연애 시작하자마자 섹스’가 바로 그것(비비의 말에 코쿤도 동의했다). 이어서 그런 과정을 ‘자만추’라고 부른다고도 했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아니라, 자고 나서 만남 추구? 넓은 범위에서는 같은 의미였지만 선섹후사여도 선섹후사라고 말하지 못했던 (나이만 M세대지 실상은) X세대 꼬리칸 언니는 몇 년 사이 달라진 의미 변화에 현기증이 났다. 성인이 된 후 가장 많이 본 미드가 <섹스 앤 더 시티>면 뭘 하나, 현실은 유교걸인데.
며칠 전 <SNL 코리아>에서 소개팅으로 만난 남녀가 ‘여기어때’로 숙소를 예약하고 카카오페이로 보내는 ‘선섹후사’ 에피소드를 봤다. 선섹후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남자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여자. 그럼 바로 확인해 보자고 제안하는 남자와 동의하는 여자. 속전속결, 깔끔한 계산.
그런가 하면 어느 관찰 예능에서 한 배우가 ‘야나두’를 ‘야놀자’로 잘못 말했다가 놀림을 받았다. 의도하지 않은 19금 말실수에 본인은 당황하고, 친구들은 까르르까르르. 그 자리에 있는 듯 나도 한참을 웃었다. 야나두면 어떻고, 야놀자면 어떠리. 자만추가 그 자만추가 아니면 또 어떻고?
중요한 건 멜로가 체질이라는 거지!
사진 <기상청 사람들>, <멜로가 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