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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Jan 29. 2023

날카로운 첫 ‘입뺀’의 추억

입장에 나이가 있더냐?

“나이가 너무 많. 다. 고. 요!”


클럽 문지기는 우리의 청력을 배려하듯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만으로 40세가 되던 날이었다.



<섹스 앤 더 4티> 11화 


#우리 나이트나 갈까?

대학 시절,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을 즐겨 찾았다. 당최 수업에 집중이 안 되거나 오늘 화장이 유난히 잘 먹었거나 새 옷을 입고 왔거나 등의 갖가지 이유로 방과 후 나이트를 도모했다. 나와 C는 그 영역에서 쿵 하면 짝이었고, 쿵짝이 맞고 나면 Y를 공략했다. “나이트 가자, 응?”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경기도민이었던 Y는 한 번에 수락하는 법이 없었다. 갑자기 외박이라니 핑계가 마땅치 않다고, 오늘 하필 ‘박시한’ 옷을 입었다 등의 이유로 몇 시간씩 쿵짝이의 애를 태웠다.


우리는 부모님이 계신 C의 집에 가서 잘 거니 엄마 아빠도 걱정하지 않으실 거라고(사실이었다), ‘준비된’ 나이트 의상에 비해 오늘 옷이 헐렁한(“절대 ‘박시’하진 않아”) 감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핫바디는 절대 숨길 수 없다고(이 또한 사실이었다) 호소와 애걸과 협박의 방식을 돌려가며 설득했다. 과정이 결코 쉽진 않지만 결국 넘어오는 게 Y였다.   


코스는 ‘서울 사람’ C가 정했다. C는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 한 잔 하고 춤추러 가는 자신의 홈 그라운드로 우리를 안내했다. 몸풀기 최애 장소는 안주 3개에 9,900원이던 신천의 반지하 술집. 우리는 늘 알탕, 탕수육, 황도(줄여서 ‘알탕황’)에 소맥을 마시며 어깨춤을 췄다. 예열을 마치면 투 스텝으로 나설 시간. 우리의 ‘지금 춤추러 갑니다’ 분위기를 알아보는 건 역시나 나이트 호객꾼이었다.

“언니, 나이트 안 가요?”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던가? 졸업반이 될 때까지 취업 준비보다 나이트에 진심이었던 걸 떠올려 보면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낭만이 있었다고 할까?


그러다 누구는 사회 초년생이고, 누구는 취업 준비생이던 스물다섯. 우리는 그 좋아하던 나이트를 끊었다. 한 호객꾼 덕분이었다. 붉은 테이블 조명에 자신의 명함을 끼운 그 호객꾼은 신분증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거기 뭐 재미있는 거라도? 그는 호객 행위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말했다.


“82야?”

“네…?” (왜 갑자기 반말? 친구 하게?)

“그런데 그렇게 ‘튕긴’ 거야?”

“아니…” (우리가 탱탱볼이냐?)

“암튼 즐겁게 노세요, 82 파이팅!”

“저기요..?!”


그때 알았다. 스물다섯은 나이트에서 은퇴를 권유받는 나이란 걸.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은 또 없어요…



#우리가 나이트를 끊었지  

춤을 끊었다고 하진 않았다.


U-23(만 23세 이하) 축구도 아니면서 ‘와일드카드’ 취급을 받은 그날 우리는 나이트에서 마지막 밤을 불태웠다. 마지막처럼 마마마지막처럼 마지막 밤인 것처럼.


‘만 23세 초과’들도 춤출 곳은 많았다. 한 층에선 힙합이 나오고 다른 한 층에선 EDM이 나오던 클럽에서 ‘우리 집으로 가자’ 하던 연예인들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목격했고, 밤 12시가 되면 바텐더들이 <코요테 어글리>처럼 춤추는 라운지 바에서 봉을 잡고 돌았으며,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헷갈리는 펍에서 엉망진창으로 팝송을 따라 불렀다. 오~빠~ 만~세~~~ 음음음음 오~빠~ 만~세에~!   


술에 취하면 별 거였던 일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듯(<술꾼 도시 여자들>에 나오는 대사다), 춤을 추면 다 끝난 것만 같던 세상도 빙글빙글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가족과 통화하다 남보다 못한 대화로 전화를 끊고, 지긋지긋하던 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차마 던지지 못한 사표를 가슴에 품은 채 열심히 춤을 추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하다 했던가? 우리는 신나서 추는 게 아니라 추니까 신이 났다. 우리는 춤꾼 도시 여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마음의 고향 같은 댄스 플로어를 꼽으라면 단연 ‘밤과 음악 사이’다. 밤과 음악 ‘사이’엔 우리의 30대가 있었다. 어묵탕에 소주를 마시다가도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댄스곡이 시작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던 곳(우리가 좋아하던 본점 1층은 무대가 따로 없는 주점이었다). 어쩌다 ‘밤사’가 즉석 만남의 메카가 되기 훨씬 오래전부터 나와 친구들은 그곳에서 옛 노래에 몸을 맡겼다.  


언젠가 밤사인지 토토가인지 별밤인지, 아무튼 복고풍 클럽에 다녀온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후배가 물었다. “선배 진짜 신기해요. 다들 어떻게 춤을 다 알죠?”


그러게. 우리 때라고 HOT ‘캔디’와 S.E.S ‘아임 유어 걸’이 체육 실기에 나왔던 건 아닌데,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시절 안무들은 몸이 기억했다. 전주가 시작되는 순간 준비 자세를 취하는 건 정말이지 내 의지가 아닌 것이다.




#바틀과 과태료

내가 만 40세가 되던 날, ‘춤도녀’의 회동이 있었다. 우리는 배운 사람답게 소맥 첫 잔을 한 번에 비우고 탄성을 질렀다. 캬, 이 맛이지!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C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늘 오래간만에 흔들자, 콜?”


‘콜’로 묻고 ‘콜’로 답하는 우리가 ‘흔들’ 곳은 응당 ‘밤사’여야 했다. 나보다 며칠 전 만 40세가 된 H가 합류하고, 83년생이라 아직 만으로는 30대인 남자 동기 M도 합류했다. 독수리 5남매라도 된 느낌이었다. 슈파 슈파 슈파, 우렁찬 엔진 소리…


하지만 미처 몰랐다. 팬데믹 동안 문 닫은 수많은 가게들 가운데 홍대 밤사도 있다는 사실을. 출입문에 ‘임대 문의’라고 붙은 가게 앞에서 우리는 잠시 황망해했다. 이제 어디로 가지? 혹시 아는 곳 있니? 우리는 목적지 없이 걸었다. 그래 홍대에 우리가 춤출 곳 하나 없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들뜬 표정의 청춘들이 길게 줄 서 있는 클럽이 보였다. 그래, 오늘은 저기야! 음악 장르 같은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줄부터 섰다. 드디어 신분증 확인의 시간. 우리의 출생 연도와 (여자 넷에 남자 하나인) 인원 구성을 확인한 클럽 문지기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조건부’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바틀’로 시키셔야 돼요.”


‘바틀’이 병맥주를 말하는 것이라면 1인 2바틀, 3바틀도 주문할 수 있었지만, 구비된 술의 종류와 가격을 모르는 상황. 어쩐지 바가지를 쓸 것만 같았다. 이를 어쩌지? 뒤에서 기다리던 Y가 무슨 상황인지 물었다. “들어갈 순 있는데 바틀로 시키래.” 그러자 Y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과태료를 내라고?”  


아니, 과태료가 아니고… 일단 옮기자.


모름지기 한국 사람은 ‘삼 세 번’. 우리는 한 군데만 더 가보기로 했다. 무슨 바틀이야, 바틀은. 과태료도 아니고, 안 그래? 우리는 다시 줄을 섰고, 입구에서 문지기와 마주하자 참참참 미션이라도 앞둔 듯 긴장했다. 문지기는 신분증 다섯 장을 돌려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바틀인가? 가뜩이나 음악이 시끄러운 클럽 입구에서, 고개를 돌리고 말하니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죄송한데 뭐라고요?” 그리고 돌아온 답변. 우리는 좀 전의 질문을 후회했다.  


“나이가 너무 많. 다. 고. 요!”


순간 딕션이 얼마나 좋던지 그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은 반경 5m 안에 없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아까 만난 클럽 문지기가 그리웠다. 지나고 보니 그는 참 친절한 사람이었다. 과태료도 아니고 바틀 그거 뭐 별 거라고.


... 그나저나 마흔, 잔치는 끝난 거니?





됐고 적시자!




사진 드라마 <서른,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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