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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Mar 30. 2023

너한테 이런 여잔 내가 처음이지?

21세기에도 결국, 최고의 연애 기술은 밀당?

얘들아, 남자는 말이다. 
언제든지 날 버릴 수 있는 여자는 신경 써도 
나 없이 못 사는 여자는 신경 안 써.  


<섹스 앤 더 4티> 15화 


어느 밤, B가 톡방에 공유한 드라마 속 장면이다. 남자에게 지기 싫어하는 변호사와 여자를 믿지 못하는 톱배우의 상극 로맨스 <연애대전>. 극 중 미란(김옥빈)은 톱스타 강호(유태오)를 따라다니다 몸싸움까지 벌이는 팬들을 진정시키며 저렇게 말한다. 


그저 좋아서 덕질하는 팬에겐 과하다 싶은 훈계. 하지만 “남자 하나 두고 여자들끼리 싸우는 걸 가장 싫어”하는 이 언니는 ‘우리 오빠’ 때문에 몸싸움까지 벌이는 동생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여자들의 우정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지만, 남자와의 연애에선 조금도 손해 보고 싶지 않은 여자. 베프는 미란이 남자라면 일단 나쁘게 보는 이유를 ‘잘못 끼운 첫 단추’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시절 사귀었던 ‘되게 멋있는 애’. 생긴 것도 멋있는데 정의로운 성격으로 하는 짓은 더 멋있던 미란의 ‘첫 단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첫 단추는 양다리였다. 다른 여자애랑 손 잡고 걸어가다 미란에게 딱 걸린 그놈. 현장에서 딱 걸린 (여자친구가 있는 줄 알면서도 그놈과 사귄) 양다리 상대가 미안해하자 미란은 이렇게 말한다. “너 하고 싶으면 해, 난 상관없어.” 그 모습에 반해 남자의 손을 놓고 미란을 따라간 양다리 상대. 그게 현재 미란의 베프다.  


미란에게 연애란 그저 남자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 빅 데이터를 바탕으로 도출한 결과는 앞에서 말한 내용이다. 남자는 나 없이 못 사는 여자에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남자들은 쿨내 진동하는 미란에게 뜨겁게 매달린다. 


오늘 처음 본 남자는 침대에서 분위기 잡다 말고 전화를 받는 미란에게 “너무 확실하게 원나이트라고 못 박힌 거 같아서 좀 그러네?”라며 투정(?)을 부리고, 모텔에서 딱 마주친 남친은 “넌 나오고 있었고 난 들어가고 있었어, 넌 했고 난 안 했다고!”라며 따지더니 이후로도 찌질하게 매달린다.  


B는 드라마를 보다 무릎을 탁 쳤고, 미란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남자는 나 없이 못 사는 여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남자는 나 없이 못 사는 여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데이팅 앱에서 몇 달째 말을 거는 남자. 관심이 없으니 대답도 시원찮은 게 뻔한데, 눈치가 없는 건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도끼질 중인지 계속 말을 걸어왔다. 


얼핏 데이팅 앱 세계 속 순정파처럼 보인 이 남자.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정보가 자꾸만 틀렸다. 생전 먹어본 적 없는 마녀수프를 ‘오늘도’ 잘 먹었냐고 묻고, 부모님과 같이 산다고 했음에도 ‘자취’ 라이프에 공감하는 말을 건넸다. 하다 하다 ‘잘 자요’ 인사를 하면서 이름 두 자 중 한 자를 틀렸다. 틀린 이름을 너무나 다정하게 부르는 메시지를 보고 B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 남자는 세상 기억력이 나쁜 남자일까? <일타 스캔들>의 ‘최치열(정경호)’ 같은 남자가 현실에 없으리란 법도 없으니까. 남행선(전도연)을 남행순, 호남선, 남궁선이라 부르던 최치열. 마침내 이름 석 자를 정확하게 불렀을 때 이게 뭐라고 몹시 감동적인 그런 사람 말이다. 


멀티 플레이가 안 되는 문어발식 작업의 계속되는 헛발질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넘치는 세계에서 몇 달째 메시지를 보내는 건 나름의 ‘근성’처럼 보였다고 할까? 


사람이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 심리가 궁금했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한테 이렇게 열심히 연락하는 이유가 뭘까? 남자의 이상형은 낯선 여자. 내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여자라서?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문득 슬퍼졌다. 데이팅 앱의 최치열이야 관심이 없으니 뜨문뜨문 답한 것이지, 맘에 드는 남자에게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는 건 불가능한 B였다. 금사빠는 아니지만, 한 번 빠지면 노빠꾸였다. 


‘밀당’ 같은 건 이제 지쳐서 못 해 먹겠는데, 맘에 드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언제든지 그 남자를 버릴 수 있는 여자’처럼 굴어야(만) 할까? 시장 가서 물건 살 때 맘에 드는 티 내지 말고 “다른 가게도 들러보고 올게요”라고 말하는 게 쇼핑의 꿀팁인 것처럼? 호감 있는 남자의 문자엔 즉답하지 말라거나 전화는 일단 받지 말고 몇 십분 뒤 문자로 연락하라는 팁 같은 건 이제 신물이 났다. 


-  그건 불변의 진리인가? 맘에 안 드는 그녀에겐 계속 전화가 오고 내가 전화하는 그녀는 나를 피하려 하고? 


나는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을 흥얼거렸다. 무려 30년 전 곡. 노래 속 화자는 연애판 ‘머피의 법칙’ 같은 신세를 한탄한다. 거리엔 괜찮은 사람 많은데 소개를 받으러 나간 자리엔 어디서 이런 여자들만 나오는 거냐고, 어쩌다 맘에 드는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고 별로 예쁘지 않은 그녀 괜히 콧대만 세다고 투덜댄다. 


<오만과 편견>의 21세기 버전 같은 <연애대전>의 두 주인공은 결국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이유는 하나다. 이런 남자(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렇다, 21세기에도 결국 그거다. 남자(여자)를 믿지 않고 사랑을 믿지 않은 주인공을 무너뜨리는 건 결국 선입견과 편견을 깨는 신선함.   


빛이 나는 솔로지만, 풍요 속 빈곤에 지친 B의 바람은 신인류의 사랑 주인공과 같다. “나도 이제 다른 친구들처럼 맘에 드는 누군가를 사귀어 보고 싶어.” 


‘언제든지 남자를 버릴 수 있는 여자’가 되겠다던 다짐은 몇 주 만에 폐기했다. 트와이스의 ‘치얼업’도 아니고, 친구를 만나느라 ‘샤샤샤(shy shy shy)’를 기술로 쓸 나이는 지났으니까. 대신 이렇게 선언했다. 


이 넓은 세상에 내 맘에 드는 남자 없겠어? 난 ‘초인류의 사랑’을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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