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차'를 사랑하는 나의 자화상
어느덧 운전대를 잡은지 10년이 넘었고, 그간 내가 실질적으로 운용하거나 내 명의로 된 차도 11대나 된다. 많은 연륜과 경험을 가진 선배들에 비하면 대수롭지도 않지만, 그나마 특이한 요소라면 지금껏 타온 차들 중 2대를 제외하면 모두 차령 20년 전후의 '썩차'라는 것일 게다.
주변 사람들-차를 좋아하건 아니건- 사이에서도 이 부분은 꽤나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곤 하는데, 여전히 한국에서 '문화로서의 자동차'의 영역에서 올드카의 영역은 지극히 니치마켓이기 때문이다. 조금씩 관심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올드카 좋아한다고 하면 특이한 사람 취급이 더 흔하다.
사실 이 주제에 대해선 스스로도 생각 정리가 쉽지 않았다. 왜 나는 썩차를 좋아하는가? 자동차가 제 혼자 운전을 하고 주유기 대신 콘센트를 꼽고 달리는 시대에 왜 호형호제할 나이의 써금써금한 차를 뜯고 있냐는 말이다. 잠이 쉬 오지 않는 밤, 끄적끄적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듣기에도 발음하기에도 애증이 묻어나는 '썩차'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참 잘 만들었다. 썩어서 썩차이자, 글로벌 시대에 외국인 친구에게 설명할 때도 "That car sucks."라고 간단히 어원을 설명해줄 수 있다. 썩차의 매력 포인트를 설명하라고 하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라지만 몇 가지만 꼽아본다.
첫째로는 저렴한 비용으로 상급 차량을 탈 수 있다는 것. 차 고르기 나름이지만 잘만 선택한다면 준중형차 살 돈으로 20세기 럭셔리 세단을 경험할 수 있다. 이미 감가가 충분히 진행됐기 때문에 수리비는 건질 수 없을지언정 차값이 더 떨어질 걱정은 내려놓아도 좋다.
둘째로는 그 차가 출시됐던 시대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 지금보다 각종 규제와 법규의 제약이 적었던 시절, 제조사들이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춰 대문짝만한 그릴과 번쩍거리는 크롬으로 도배된 차를 만들지 않던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차를 만들었는지 직접 타면서 느낄 수 있다.
셋째로는 차 예쁘단 소릴 많이 들을 수 있다는 것.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 한국처럼 '송구영신' 좋아하는 땅에서 오래된 것은 새것 이상으로 빛이 난다. 나의 가치관과 개성을 오롯이, 그리고 강렬하게 세상에 전할 수 있다. 동승자에게 "어떻게 이렇게 차 관리를 잘 했냐"는 소릴 듣거나, 세차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차 멋있다"고 칭찬해주면 자신의 카 라이프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난다.
마지막 넷째로는 차뿐 아니라 스토리를 소비할 수 있다는 것. 가령 내 첫 차였던 EF쏘나타는 아버지의 애마이자 우리 가족이 모이는 장소였다. 독일에서 태어나 아메리카 대륙을 달리던 E39 540i는 바다를 건너 서울에 왔고, 한국 1호차였던 푸조 206은 네 번째 주인을 만났다. 또 분당 살던 아저씨가 한성자동차에서 출고한 W202는 다음 변신을 꿈꾼다-지금 이 글을 다듬는 시점에는 206과 W202는 새 주인을 찾아 떠났고, 잘 살고 있다-. 올드카를 탄다는 건 그 차가 탄생했던 시대의 스토리를, 그 차를 운전했던 사람들의 스토리를 소비하는 일이다.
내가 썩차 사랑을 읊으면 썩차의 온갖 단점과 문제점을 나열하며 내 주장을 반박하려는 경우가 많다. 눈먼 썩차 사랑의 비참한 말로를 걱정해서일 수도 있고, 그냥 내 의견을 논파해보고 싶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썩차를 좋아하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 섣불리 썩차를 타라고 추천하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래된 비싼 기계를 다루는 게 만만할 리 없다. 백날 죽어라 예방정비를 해도 수만 개의 부품 중 어디선가 수명을 다한 녀석이 갑자기 펑 터지는 게 일상다반사다.
그 뿐이랴, 국산차는 부식과 부품단산에, 수입차는 신차값 따라가는 부품값과 이걸 어떻게 뜯으라고 만든 건지 모를 오버엔지니어링으로 말미암아 살인적인 공임에 속이 쓰리다. 몇 번 고치다보면 뭘 얼마나 잘 해보겠다고,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지 현자타임이 몰려오곤 한다.
보험은 또 어떻고. 차량가액은 똥값인데 수입차라고 보험료는 비싸지, 어쩌다 뒤에서 받히기라도 하면 비싼 수리비때문에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일도 많다(물론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올드카를 타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애로사항이다).
그럼에도 썩차를 붙들고 있는 건 돈 없는데 수입차 타고 싶어서도, 요즘 신차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서도 아니다. 기자 생활을 하며 신차만 300대 가까이 타 봤는데 신차 좋은 줄 모를까봐? 단지 내게는 그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올드카를 타면서 얻는 만족이 더 클 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올드카를 타면 스트레스때문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길에서 번쩍이며 지나가는 누군가의 올드카를 보고 마음을 빼앗겨 덜컥 썩차에 입문했다가 몇 달만에 완전히 질려버리고 차를 헐값에 되파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썩차 라이프를 시작하고 싶다면 몸과 마음, 그리고 통장의 삼위일체가 충분히 준비돼야 한다.
대단한 정비 능력이나 비장한 정신무장, 천문학적인 수리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된 자동차는 필연적으로 말썽을 부릴 수밖에 없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또한 썩차와의 교감이요, 카 라이프의 묘미다. 일반적인 차를 타는 것보다는 다소 바지런을 떨어야 하고, 이상이 생겼을 때 스트레스에 위염약을 삼키지 않을 것이며, 적어도 문제를 감당할 약간의 경제적 마진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일단 구매만 하면 아무런 고장도 숙제도 없이 그저 그 멋 그대로 타기만 하면 되는 차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아직 썩차를 타기는 좀 이르다(물론 육체적·정신적 수고는 모두 금전으로 치환 가능하다; 당신이 어떤 문제든 돈으로 해결할 만큼의 재력이 있다면 상관없다). 가면 가는 대로, 퍼지면 퍼지는 대로 즐기는 여유가 곧 썩차의 멋이다.
자동차를 즐기는 방법은 자동차의 종류만큼 다양하다. 혀로 휠 닦으며 세차하는 사람도 있고, 20인치 11.5J 휠에 캠버 4.5도 넣고 자세잡으며 타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세워져있는 올드카에서 만족을 얻는 반면 누군가는 운전이 재미있는 차 타고 서킷을 빡세게 타며 희열을 얻는다.
썩차 역시 그 중 하나다. 다른 형태의 카 라이프보다 결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간혹 낡은 차를 탄다고 어쭙잖은 부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올드카를 타는 건 자신의 멋과 만족을 위해서지 타인의 인정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소탈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는 재미를 찾으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조금 더 먼저, 더 많은 썩차를 타 본 입장에서 감히 단언컨대 카 라이프는 올드카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낡고 오래된 차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경험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이에겐 분명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자동차의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당신, 썩차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