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May 10. 2023

[공개 일기] 수요일: 그림으로 이어지는 인연

2006년에 내가 다니는 회사로 2~3명의 대학생이 그림을 들고 찾아왔어. 미대생인데 재료비와 유학비를 벌기 위해 그림을 팔고 있다면서 말이야. 내가 관심을 보이자 나중에 자기가 유명한 화가가 되면 이 그림이 몇억 대에 거래가 될 거라고 했어. 난 그때 이 학생들의 말을 들으며 웃었을까?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그건 기억이 안 나.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당장 현금도 없던 내가, 그 자리에서 동료에게 돈을 빌려 그림을 2점이나 샀다는 것만 기억이 나. 그림이 꽤 무거웠는데 그걸 어떻게 집에 들고 갔을까? 남자친구(지금 남편)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했을까? 그것도 기억이 안 나. 한 점은 언니네 집에 선물해 주고, 한 점은 고이 모셔뒀다가 신혼집 거실에 걸었다는 것밖에.


올해 봄, 회사 동료가 삼청동에 있는 미술관에 갔다가 찍은 사진을 보여 줬어. 초록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그림이었지. 그림 속에 보이는 빨간 커피잔과 까만 개도 인상적이었어. 그림의 색감이 좋았어. 주요 색이 초록과 파랑이어서 눈이 편안했지. 이렇게 '김보희' 작가님을 알게 됐어. 이 작가님이 제주도에 산다는 것, 그림의 대부분이 제주도 풍경이라는 것도 말이야.


그러다 우연히 신문 기사를 읽다 '김보희' 작가님이 '그림 산문집'을 냈다는 걸 알게 되었어.

분주해진 평온한 날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시원하고 편안한 그림을 책 속에 담았다니 어서 사고 싶었지. 그림은 못 사더라도 말이야. 그러면서 한 사람을 생각했어.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어.


그 사람과 난 필사 모임 멤버야. 두 달간의 필사 여정이 마무리될 때쯤 그 사람이 먼저 나에게 5월 4일에 본인과 아티스트데이트를 하자고 했어. 난 흔쾌히 좋다고 했고. 우린 5월 4일 11시쯤 용산역에서 만나 같이 음악 감상을 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지. 그날 아침 난 엽서를 써서 조심히 김보희 작가님 책에 넣었어. 혹시나 그 사람이 이미 이 책을 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분의 남편도 그림을 좋아하니까 집에 책이 두 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5월 4일 난 용산역에 너무 일찍 도착했어. 대합실에 앉아 책을 읽을까 했는데 오랜만에 용산역을 구경하고 싶었어. 용산역 내부에는 한 갤러리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지. 다양한 작가의 그림을 하나씩 천천히 감상하다가 갑자기 내 발걸음이 한 그림에 멈췄어. 신인 작가라고 소개된 작품이었는데, 우리 집 거실에 있는 그림과 너무나 유사한 거야. 누가 봐도 같은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때 그 대학생이 이제 신인 작가가 된 것인가? 17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왔을지도 몰라. 그동안 진로에 대한 고민도 했겠지? 그림이 변하지 않은 걸 보니 이 길을 쭉 걸어왔던 것 같아. 그 학생은 곧 신인 작가가 아닌, 당당히 본인의 이름으로 인정받는 날이 오겠지? 그 학생은 알까? 그 학생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학생에게 건네받은 그림은 이렇게 인연의 굴레를 만들어 그 학생과 나를 엮고 있다는 것을. 우리 집에 이 그림이 아직도 걸려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과 음악 감상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 수다보따리를 풀기 위해 카페로 갔어. 이야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쯤 김보희 작가님의 책을 꺼냈지. "언니 혹시 김보희 작가님 아세요?" 그 사람은 모른다고 했어. 정말 다행이었어. 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책을 건넸어. 편안한 색감의 그림을 보여 주며 언니를 생각했다고 했지. 언니도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더니 최근에 그린 만다라 그림을 보여 줬어. 거기에는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만다라가 있었어. 김보희 작가님 그림과 비슷한 색감의 만다라 그림이 말이야.


'나와 그 학생', '김보희 작가님과 그 사람', '나와 그 사람'의 인연이 자연스럽게 얽히는 느낌이 들었어. 나는 그 사람 덕분에 그 학생의 그림을 17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고, 그 사람은 나 덕분에 김보희 작가님을 알게 되었지. 이후의 인연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시간이 흐른 뒤 그 사람의 집 거실에 김보희 작가님의 그림이 걸려 있을지, 우리 집에 그 학생의 다른 그림이 걸리게 될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공개 일기] 토요일: '태명'이 사전에 없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