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공주를 일제강점기 종가 여성으로 재해석해 보았습니다.
저기저기 보이니?
30리 밖 만석꾼 집안의 새색시가 꽃가마 타고 신행 행차하는 모습 말이야. 가마를 덮은 호랑이 담요에 얼추 보아도 몇십 명은 되어 보이는 짐꾼들의 위용이 대단하네그려.
새색시는 짚불을 넘기 전부터 큰집에서 온 사람이라 하여 귀한 대접을 받았어. 그런데 애석하게도 혼인한 지 몇 회가 지나도록 자식 소식이 없네. 제삿날에는 일가가 모여 차종부의 정성을 탓하며 말에 말을 얹었지. 부인은 정성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낮에는 극진히 접빈하고, 밤에는 울렁이는 달빛 아래서 치성을 드렸어.
한 날, 탁발하고 돌아서던 노승이 무명 천 조각에 곱게 쌓여있던 보리쌀을 건네며, “꽃을 피워 보십시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으니 뜻이 닿겠지요.” 하는 거야. 부인은 흙이 보드랍고, 손이 타지 않을 곳에 보리를 심고 신줏단지 모시듯 돌보았지. 드디어 보리쌀이 노랗고 빨간 꽃을 피우던 날, 집안에도 경사가 있었어. 바로 새 식구 소식이었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던 날, 고택은 소란해졌어. 아기가 너무 작았지 뭐야. 더욱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 아니니, 작은 것은 대접받기가 힘들었어. 허나 사랑어른은 딸도 귀하다며, 말 많은 이들을 꾸짖었지. 그리곤 딸에게 ‘엄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 어르신이 유학 시절에 보았던 서양 책에 나온 손가락만 한 공주의 이름이 엄지였다지 아마.
엄지는 무럭무럭 자라 학교에도 다녔어. 비록 일본어를 쓸 수밖에 없는 비통한 상황이었지만, 언젠가 나라를 위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했지. 집에서는 고운 수놓는 법을 배웠어. 아버지께서는 신식 자수 도안이 담긴 외국 잡지를 구해다 주시기도 했고.
쇳덩이라면 숟가락마저 빼앗아가던 일본군들은 급기야 고택을 에워싸고 식구들을 포박했어. 아버지는 체포되긴 전 엄지를 사당 안 궤에 숨겨주시며 인자한 목소리로 “건강하여라. 옳은 일 하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하셨어. 엄지는 그저 눈물만 흘렸지. 궤를 뚫는 공기가 칼 같은 것이 오경쯤 됐으려나, 불쑥 한 사내가 나직이 “아가씨 저를 따라오세요.”하는 거야. 달리 방법이 없어 사내를 따랐지. 여차저차 배에 오르자 사내가 말했어.
“집안 어르신들께서 독립운동 자금을 주신 것이 빌미가 되었습니다. 제 옆에 계셔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리가 아가씨를 아둔한 제 자식 놈의 배필로 삼으려고 하니 부디 배에서 내리시거든 멀리멀리 떠나십시오.”
이튿날 밤, 엄지는 깊은 숲에 홀로 서게 됐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날을, 그저 별이 내릴 때까지 걷고 또 걸었지.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숲은 들판으로 바뀌었고, 저 끝에 집도 한 채 보였어. 죽을힘을 다해 도착해 인기척을 내니 허리가 굽은 노파가 나와. 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아니면 그저 먹을 것 조금이라도 나눠줄 수 없겠냐며 울먹였지. 노파는 엄지의 모습을 살폈어. 시국이 시국이라 그랬는지 어디서 온 누구인가 대신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지. 엄지는 수를 놓고, 글도 안다 했어. 노파는 반색하며 “그럼 한번 같이 살아보자꾸나.” 하였어.
이런저런 일을 하며 날을 보내는데, 어느 날은 “수완이 좋아 부자가 된 이가 오니, 처신을 잘하거라. 분명 운을 틀 수 있을 게야.” 하며 노파는 수선을 떨었어. 해진 후에야 온 손님은 아버지가 즐겨 입으시던 벨벳 프록코트를 입고 자신을 ‘중추원 참의’라 했지. 점잔 빼려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말을 했지만, 의심이 많아 쇠 지팡이로 이곳저곳을 툭툭 쳐내며 다니는 모습에선 격을 찾을 수가 없었어. 생김새는 또 어찌나 기괴한지. 눈동자는 처진 눈꺼풀에 쌓여 보이질 않고, 코는 길쭉한데 콧구멍은 돼지코처럼 발랑 드러나 있고, 손은 머리보다 큰 것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지. 꼭 두더지 같았어.
한날, 으스대는 양반걸음을 걷는 참사를 좇아 할머니와 걷는데, 날개 꺾인 새 마냥 쓰러져있는 소녀가 보였어. 엄지가 다가가려 하자 참사는 지팡이로 매섭게 막아서며 동티난다 했지. 글쎄, 무엇이 부정일까? 신이 아니어도 알 일을 모르는 이들이 천지에는 이리도 많단다. 옳음을 아는 엄지는 돌아오는 길에 몰래 소녀를 살폈어. 옅은 숨은 애원 같았지. 빈집에 뉘고는 틈날 때마다 찾아가 성심껏 간호했어.
정성이 닿아 소녀가 자신의 이름이 ‘연수’라고 말해주던 날, 목소리를 듣고 소녀가 여름내 동네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그 착한 이임을 알았지. 연수는 경성에 가고 싶어 했어. 엄지는 수놓은 베갯잇을 헐값에 팔아 기차표를 샀지. 연수가 경성에 같이 가자 했지만, 엄지는 누더기 소녀에게 보리밥을 내어주던 할머니가 아른거려 떠날 수가 없었어.
사흘이 멀다고 찾아와 의뭉스레 말을 건네던 참의는 청혼 서를 보냈어. 노파는 엄지의 의중을 묻지도 않고 허혼했지. 이 혼사가 자신의 덕이라며 생색도 냈어. 혼인날이 정해진 후로는 혼수 장만을 위해 밤낮없이 베틀에 올라야 했어. 엄지는 혼인이, 그보다는 참사가 싫었어. 용기를 내어 혼인이 싫다고 하자 할머니는 궁지에 몰린 들쥐처럼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굴었지. 엄지는 두 번 다시 말을 꺼내지 못했어.
이불과 두루마기가 지어질수록 엄지의 가슴에는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했지. 담장 밑에 샛노란 꽃을 피운 애기똥풀을 보니 괜스레 서러워 눈물도 났어. 누군가 다가오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연수가 낯선 외국인과 미소 짓고 있었지. 여성은 고아들을 도와주는 선교사인데 경성에 있는 여성 학당에 보내주겠다고 했어. 엄지는 친구와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울컥해 그 길로 연수와 선교사를 따라나섰지.
선생님들께서는 엄지공주가 왕자를 만나‘마야’가 된다며 농을 하곤 하셨어. 온돌이 아닌 기숙사의 마룻바닥은 낯설고 차가웠지만, 동기들과 함께 배꽃을 바라볼 수 있어서 행복했지. 그런데 어느 날 먼 친척 분이 오셔서 “되찾은 재산도 있고, 생전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혼처도 있으니 고향으로 가자꾸나.” 하셨어. 사진 속 교복을 입은 사내는 체격이 크진 않지만 또렷한 눈매가 총명하고 다부졌지. 딸의 배필을 찾아주시기 위해 얼마나 깊은 고민을 하셨을까. 부모님의 사랑이 엄지의 심장에 선명히 닿는 듯해 혼인을 승낙했지.
연수는 스웨덴을 거쳐 덴마크에서 공부를 마치고, 우리나라 첫 여성 경제학 박사가 되었어. 이름처럼 제비가 되어 세상 곳곳을 다니며 우리나라의 상황을 알리고, 귀국 후에는 학생들에게 큰 세상이 있음을 일깨워줬지.
엄지는 어떻게 됐냐고? 천년 고택의 종부가 되었지. 시집오던 날은 가마 대신 지프차를 탔는데 길이 험해서 시집살이 연습이라도 하듯 고약한 멀미를 했어. 그런데 그보단 밤벌레 소리를 음악 삼아 수를 놓으시며, 가마멀미 이야기를 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어찌나 나던지. 시집오던 날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그랬듯, 엄지는 부모님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울었어.
세상이 안온해지며, 독립운동가 후손인 종손과 종부의 이야기는 회자되었어. 많은 이들이 말과 글로 전했지.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거야.
엄지 종부님은 지난한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시고, 이제 백수(白壽)를 앞두고 계신단다.
어때? 함께 엄지 할머니를 뵈러 가보지 않으련?
< 글을 마치며 >
엄지 공주를 다시 읽으며 학업을 위해 인터뷰했던 많은 여성분이 떠올랐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살아온 길의 많은 것들이 잊히거나 흐릿해집니다. 그런데 제가 만난 기혼 여성의 대부분은 결혼식과 첫아이를 낳은 순간은 장면 장면을 묘사할 만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환갑에도 팔순이 넘어도 잊히지 않는 그 경험은 기억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 것 같았습니다. 안데르센과는 성별과 태어난 곳 마저 다르지만 부부가 되어 자녀를 갖고픈 마음, 성장통을 겪고 성인이 되어 결혼을 꿈꾸는 마음을 표현한 지점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행 오는 길, 가마 멀미, 혼수품 준비등은 어르신들께서 제게 해주셨던 이야기입니다.
연수는 '제비 연[燕], 빼어날 수[秀]'를 넣어 만든 이름입니다. 스웨덴에서 유학 후 우리나라 첫 여성 경제학 박사가 되었지만, 시대적 아픔으로 인해 고국에서 채소를 팔다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최영숙 선생님을 떠올리며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