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NAG May 30. 2024

터널 위의 꾀끼깡꼴끈?

제발 운전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말아주세요

교통안전 캠페인과 관련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주의를 끄는 전광판이나 표지판, 캠페인 등은 오히려 운전자들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교통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터널 위의 꾀끼깡꼴끈이 이슈였습니다.

"저거 읽다가 사고나겠다"…부산 터널입구 정체불명 5글자 논란 (naver.com)


????

꾀끼깡꼴끈?



부산에 위치한 대연터널 위에 이상한 글씨의 구조물이 세워져있어서 운전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킨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대연터널은 도시고속화도로에 위치해 있어서 제한 최고 속도가 80km/h인 걸로 확인됩니다. 안 그래도 터널은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구간인데, 왜 이런 이상한 예쁘지도 않은 구조물을 설치해 두었을까요?



똑같이 예쁘진 않지만 그래도 이건 도로 한복판에 있진 않네요....


기사에 따르면  '꾀, 끼, 깡, 꼴, 끈'은 부산의 높으신 분께서 올해 초 시무식 때 말씀하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공직자가 가져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인데, 꾀(지혜), 끼(에너지·탤런트), 깡(용기), 꼴(디자인), 끈(네트워킹)을 뜻한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꾀, 끼, 깡, 꼴, 끈의 뜻을 알고 나니 문구가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주철환 작가라는 분께서 처음 언급하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걸 굳이 구조물로 만들어서, 굳이 도시고속화도로에 있는 터널 위에 설치했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꾀끼깡꼴끈을 보면 주의가 분산될 거라고 심리학을 배우지 않으신 분들도 쉽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꾀끼깡꼴끈은 우리가 평소에 볼 수 있는 글자 조합이 아니니까 말이죠. 저도 처음 기사를 봤을 때 사진을 보고 도대체 저게 뭘까 잠깐 생각에 빠졌습니다.

'대연터널 위에 꾀끼깡꼴끈 구조물이 보인다면 절대로 진입하지 마십시오.' 같은 나폴리탄 괴담인가...


그렇다면 당연히 많은 운전자들 역시 터널 위에 설치된 저 구조물을 보고 '저 글자는 무슨 뜻일까?', '저건 대체 뭘까?' 하면서 잠깐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기사로 꾀끼깡꼴끈을 본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꾀끼깡꼴끈의 실물을 보게 될 사람들은 제한 최고 속도 80km/h의 도시고속화도로 터널을 진입하는 운전자들입니다.


자칫하면 대형참사…터널 교통사고로 5년간 128명 사망 | 연합뉴스 (yna.co.kr)


심리학에는 집단사고(Groupthink)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응집력이 강하고 폐쇄적인 집단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향성을 뜻하는 말이죠. 


공공 조직이 응집력이 강하고 폐쇄적인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런 집단에서 리더에게 밉보이는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의견들은 대부분 묵살되고, 기분을 좋게 해줄 수 있는 의견들만 살아남게 되죠. 


의사 결정이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더라도, 정년이 보장된 공공 조직에서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다른 의견을 내는 건 쉽지 않기도 하고요.


그렇다 보니, 나라에서 하는 일 중 일부는 일반 시민들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건도 비슷한 이유로 일어난 일이 아닐까 추측해 보게 됩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저는 무슨 의도로 저 위치에 저 구조물을 설치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냥 뭔가 설치하기 제일 만만한 곳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해서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었다면 유동인구가 많은 길거리에 설치하는 게 효과가 더 좋았을 것이고, 공공디자인 개선을 위해서였다면 적어도 터널 위 풀숲에 저런 모양으로 설치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진실은 높으신 분들이 알고 계시겠죠.


개인적으로 저 구조물은 꾀도 없고, 끼도 없고, 깡도 없고, 꼴도 없는 오로지 끈(네트워킹이라 쓰고 라인타기라고 쓰는)만 가지고 만든 구조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공 디자인 개선, 좋은 글귀를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그 행동이 불러올 결과들을 더 면밀히 살펴보고 일을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특히 그게 시민들의 안전과 관련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말이죠.


P.S. 결국엔 사흘만에 철거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