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의 미니멀한 이야기
'강원 작가의 방' 레지던시에 선정되어 오늘부터 30일간 춘천에 산다.
안내를 받고 들어선 스튜디오는 작은 베이지색 정사각형에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침대 하나, 미니 행거 하나, 미니 캐비넷 하나가 전부.
너무나 단촐한 살림살이에 이상하게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가
서울의 내 방이 떠올라 뭔가 모를 웃음이 하, 하고 났다.
아마도 (매 해 입지도 않은 채 걸려있을 200벌 남짓의 옷들과 함께) 족히 500벌은 될 계절 별 옷가지들, 잔뜩 달라붙은 고양이 털을 날 잡고 떼리라 마음먹고 모아둔 박스 한가득 검은 옷들, 책상 위 쌓이고 쌓인 문서, 수첩, 책자, 브로슈어. 그리고 쓰지도 않는 화장품 50여개... 먼지 쌓인 향수. 사놓고 안 읽는 책,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말린 체리 라던가 고양이는 쓰지도 않을 고양이 칫솔 같은 쓰잘데기 없는 물건들. 왜 아직도 책상에 있는지 모르겠는 다 쓴 배터리, 영수증, 접힌 쿠폰 따위...
나열만으로 한 시간이 족히 가버릴 정도로 많은 그 물건들이
이곳엔 없다.
'그래도 살 수 있나?'
엄선하여 데려 온 한달치 짐을 끄른다.
깨끗하던 공간이 스믈스믈 채워졌지만 절대, 내 방만큼 채워질 순 없지.
(암, 야수의 방이 되려면 멀었지)
과연 이게 될까? 싶으리만치 폭이 좁은 행거에 가져온 옷을 하나씩 꺼내어 건다.
뭐지? 이 자명한 나의 취향이라니.
블랙이 아니면 애니멀 프린트. 결국 내가 엄선한 건 너희들 정도구나.
하루치 옷밖에 못 걸것 같았던 미니 행거에 옷들을 전부 걸자 묘한 충만감이 몰려왔다.
'어쩌면, 이정도 옷만 있어도 살 수 있을지도...?'
조금 멀찍이 물러나 다시 행거를 본다.
아직도 벽은 한없이 넓어 보인다. 옷들로 가득 미어져 벽이라는 걸 본지 오래인 내 방과는 다르다.
이 곳에 처음 들어왔을때의 그 묘한 시원함이 뭔지 알것 같았다.
비어있다는 것
내가 생각을 할 틈이 있다는 것
상상을 하거나, 멍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는 것
왜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살았지?
왜 그렇게 계속해서 물건을 사들였을까?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생각을 멈추고 침대 한 귀퉁이에 앉아
미니멀리스트가 아닌 맥시멀리스트로 사는
도봉구 어귀, 어느 야수의 방에 구겨져 누워있는 나를 바라본다
딱하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내가 너의 주인이다 생각하며 집으로 데려왔을테지만
그 물건들이 나의 공간을 채우면서 나는 구겨지고 물건들은 제 몸의 크기만큼 다리를 펴고 앉았다.
비워야 한다.
아니,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비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깔려 죽을 지도 모른다.
물건들이 함께 끌고 들어온 이야기에, 목적에, 의무에, 의미에
나는 정말이지 깔려죽을지도 모른다.
비우자
서울에 가면 꼭 비워내자
이 문장과 문장 사이만큼
하얀 공간이 가득한 방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