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봄 한 움큼 움켜쥐기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이다. 아무도 안 믿을 거다. 내가 새로 이사 온 후로 이제 한 달이 되어 가고 있는데 여태 비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햇볕이 쨍쨍한, 뽀송하다 못해 건조한 영국이라니 말이 되는가 이 말이다.
이상기후다 온난화다 걱정들이 많은 가운데 은근슬쩍 '그래도 나는 지금 너무 좋아' 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영국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기분이 갈팡질팡 하다. 이대로 좋은가...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새도 없이 봄은 그렇게, 이렇게 몽실몽실 날아와 내 손목에 붙어 있었다.
오늘은 내가 활동하고 있는 교내 친환경 커뮤니티 EcoHub에서 낡은 헛간 외부에 페인트를 칠한다고 해서 도와줄 겸 학교에 갈 참이다. 사실 3일 후에 마감인 에세이도 있는데 이럴 때가 아니긴 하지만 어쩐지 급할수록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날도 좋은데,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좀 지치고 말이지.
그리고 얼마 전 빌린 자전거도 또 열심히 타줘야 하니깐.
아니 갑작스럽게 갑자기 편도에 2-3파운드 (=4~5,000원 이하)이던 버스 요금이 하루아침에 4파운드(8,000원)로 올라버렸지 뭔가. 코피 터지는 요금인상에 어안이 벙벙했는데 원래가 이 금액이 맞다고. 코로나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하려고 정책적으로 요금을 인하했던 것이 이제까지 유지되었던 거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학교를 한번 오가면 16,000이라니 점점 가기가 싫어질 것 같아서 지난주부터 자전거를 장기 렌트했다. 2개월 반에 50파운드(10만 원)를 주었다. 보통 사설 렌트숍이 한 달에 50파운드 정도이니 나는 대학생 특혜로 굉장히 싸게 렌트한 셈이다. MTB자전거라 쿠션감도 좋고 다 좋은데 다만 학교까지 가는 길이 오르막이라 그게 좀 힘들다. 갈 때가 오르막이면 돌아올 땐 내리막이어야 하는데 여기는 일방통행이라 돌아오는 길도 또 오르막. 이럴 수가!!! 그래서 여기저기 물어서 조금 돌아가지만 호수 쪽으로 가는 길을 알아두었다. 돌아갈 때는 그 길을 이용해 봐야지.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페달을 열심히 굴러 학교에 도착했다.
헛간은 하난데 사람들이 대여섯은 달라붙었다. 도와줄 사람이 별로 안 올 것 같아서 온 건데 너무 인기가 많잖아?? 다들 아마 시험기간이거나 논문 기간일 텐데 나처럼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들 온 것 같다. 생각 없이 쓱싹쓱싹 칠하면서 힐링 모먼트-. '나무 위에 페인트라니 정말 촌스럽겠지' 하고 혼자 킥킥 댄 것이 무색하게 페인트가 벽돌 가루를 물에 갠 것처럼 색도 자연스럽고 나무에 착 스며든다. 칠하는 기분이 난다. 아싸!
이 에코 허브는 한국으로 치면 생태 동아리?라고 해야 할까. 매주 모여서 밭의 잡초를 뽑거나, 학생들이 기증(?)한 음식 쓰레기를 발효시켜 퇴비를 만들거나, 키워낸 밭에서 나온 과일들로 잼을 만들거나 하는 활동을 주로 한다. 풀 만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마치 규방에 모인 각시들모냥 수다 삼매경이다. (나의 이상한 편견인데, 이렇게 자연, 풀, 식물들을 좋아하는 남자분들은 대체로 수다쟁이인 것 같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범하지 않으려 하지만 나의 지인들의 경우를 보면 예외 없이 100%다. 우연일까??)
두 시간을 꼬박 일했는데도 다섯이서 헛간 하나를 겨우 칠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구나. 다 마르면 다시 덧 칠 하기를 여러 번 해야 하니 아무래도 진행이 더뎠다. 그래도 칠해놓고 나니 뿌듯해 서로 격려하면서 붓을 내려놓았다.
"다들 벤치로 가서 물 한잔씩 하자! 탈수 증세 올지도 몰라"
안 그래도 햇살이 너무 직사광선인 데다가, 날도 건조해서 입이 바작 바작 마르고 있던 참이었다. 벤치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멀고 뜨거운지. 모자를 썼는데도 햇살이 사방에서 나를 공격해 오는 느낌이다. 도대체 해가 어디에 떠있는 거야. 그 와중에 쨍 하니. 색을 뽐내고 있는 Blue Bell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저렇게 색이 고울까? 블루벨이라는 이름처럼 슬쩍 흔들면 어쩐지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시호, 이거 봐봐. 너 Rhubarb(루바브) 본 적 있어?"
태양을 등지려 게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를 에코허브의 회장 James가 갑자기 불러 세운다.
"루바브? 우리 밭에 루바브가 있어?? 나 그거 맨날 너무 궁금했었는데!!!"
"먹어 봤어?? 밭에 꽤 많아. 오늘 따가서 크럼블 만들어 먹어!"
안 그래도 나는 루바브가 늘 궁금했다. 슈퍼마켓에 가면 루바브 잼, 루바브 파이, 루바브 주스... 도대체 루바브가 뭐길래. 가공된 식품은 봤어도 실물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무성한 잡초를 헤치고 어렵사리 몇 줄기를 꺾었다. 억세긴 또 엄청 억세네. 그래도 색이 참 예쁘다.
나무 위키에서 슬쩍 검색해 보니
생긴 것도 그렇고 과육이 아니라 줄기를 식용하므로 채소에 가까우나, 주로 유럽에서 루바브를 수입하던 미국은 관세를 줄이기 위해 19세기에 루바브를 과일로 정의하였고 이는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과일[1]에 가까우나 관세 문제로 미국에서 채소 취급받은 적이 있던 토마토와는 반대의 사례. 이 시기 미국에서는 루바브와 딸기를 이용한 파이가 유행이 되기도 했는데 이는 현재도 루바브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디저트이다.
라고 하는데. 아니 이 생김새가 과일이라니 너무 황당하다. 관세가 이들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다니... 대충 시큼한 맛이라고 하는데 어떠려나 하고 슬쩍 베어 물어봤는데 으흐- 경험해 본 적 없는 시면서도 짠맛? 뭔가 쇠맛 같기도 하고 희한한 맛이다. 호불호가 갈린다더니 역시 그렇네. 잼이나 만들어먹어야겠다.
마치 무사의 검처럼 백팩에 대각선으로 꽃았다. 너무 길어서 위로 삐죽 튀어나온다. 나 참. 이러고 도서관에 가기는 좀 그렇겠지?? 흡사 시장에서 대파 한 단 사 들고 나온 아주머니 느낌이다. 에이. 집에 가자. (공부를 제쳐 둘 핑계는 늘 실시간으로 마련되는 편이다) 학교에서 도로까지 내리막이 심해서 자전거를 모시고 천천히 걷는데 아니 이럴 수가, 민들레 밭이잖아?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역시나 사진 상으로는 잘 표현되지 않지만 내가 본 민들레 무리 중 가장 큰 집단이었다. 세상에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해님이 졸린 눈을 스르르 감기 시작하는 이 시간이야 말로 민들레 씨앗을 날리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후우 하고 불면 날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다정하고 청초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잔디밭에 앉아 씨앗 날리기에 심취해 있으려니 새삼스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영국에 있는 건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에 천국에 있는 건가...' 하는 어안이 벙벙함이 올라온다. 들판에 앉아 하염없이 민들레 씨앗을 불어 보던 게 언제였을까? 해가 질 때까지 들판에서 흙 위에 구르던 적은?
그렇게나 빠르게 지나가던 시간이 여기서는 왜 제 속도로 가고 있는 듯 느껴질까? 정말 이곳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걸까?...
설명할 길 없는 이 순간을 나는 '충만함'이라 이름 붙이기로 했다. 지금 내가 앉은 이곳의 공기와 온도, 햇살, 보들보들 민들레 씨앗과 텃텃한 흙냄새까지- 저마다 앞다퉈 자기 얼굴을 나에게 부벼대는 바람에 나는 사방이 그리 조용한데도 정신이 알알했다. 이런 게 온전히 느낀다 라는 거구나. 충만한 순간 속에 내가 지금 있구나. 또 울컥 해졌다. 너무 좋아서 사람이 울컥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 와서 자주 그랬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 내 마음껏, 한껏 담아두어야겠다. 한 움큼씩 잡아서 양 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꾹꾹 담아 넣어두자. 언젠가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잊지 말고 탈탈 털어내 그 내음을 한껏 맡아야 하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은 눅눅해진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선다.
자, 이제 가야지. 집으로.
심드렁하니 누워있던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은 우습게 빨개진 내 코끝처럼
오늘의 해 도 이제 그렇게, 붉게 저물고 있다. 고마워. 전부, 모두.
기분 탓인지 주머니가 묵직한 것만 같다. 그래보았자 페달은 이미 하늘을 구르고 있다고!
아차. 새로운 길로 가 보기로 했지.
씽씽씽 달려 룬 강을 따라가는 길로 들어선다. 뭐라고?
잠깐만, 오늘의 천국은 아까로 끝난 것 아니었어? 아직도 줄 행복이 남아있었어??
나는 저무는 너를 계속 바라보면서 달릴 수 있는 거였어??
기쁨인지- 행복인지- 감동인지- 희열인지.
이름 붙일 수 없는 순간들이 풍경과 함께 계속 나를 훅 훅 훅 스친다.
앞에 저건 뭐지? 먼지 떼?? 아니구나, 벌레들이었어!
날파리 무리가 날 발견하고는
이 무드를 깨기라도 할 기세로 자꾸만 안경에 틱 틱 부딪혀 온다.
"지금이야!"
"지금!"
"지금이야!"
라고 자꾸 나에게 알려주는 것만 같다.
뭐가?
자꾸 시야를 가리며 성가시게 부딪혀오는 녀석들을 팔로 휘휘 저어 쫓으며 나는 말한다.
뭐가 지금인데?
"너의 최고의 순간!"
"지금!!!"
“지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