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다가 자전거 바퀴 터질 뻔한 썰 풉니다
오늘은 랑카스터에 있는-정확히는 랭커셔 지역에 기반을 둔- 에그컵(EGGcup)이라는 사회적기업이자 커뮤니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어서 오가다가 보긴 했는데, 에그컵이라는 이름만으론 뭐 하는 곳인지 알기가 조금 어렵기도 하고, 편의점이라기엔 물건의 종류가 아주 다양하지는 않아서 그냥 푸드뱅크 같은 개념인가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곳이다. 오늘은 용기를 내어 기웃기웃 해보기로 했다.
알아보니 이곳은 지속 가능한 식량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커뮤니티 기반 조직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이 더 공평하게 분배하기위해 보통 대형 마트나 식품 생산업체에서 팔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수거해서, 지역 주민들에게 아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거나 무료로 나눠준다고 한다. 식량 정의(food justice)와 지속 가능한 사회 변화를 실현하려는 철학. 와, 너무 좋잖아?
오늘 보니 멤버십 제도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일주일에 5파운드 그러니까 약 9천 원 정도 내면,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날에 와서 이곳의 물건을 그야말로 한가득! 가져갈 수 있다.
야채, 과일들 그리고 통조림, 건조식품, 냉동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는 이곳은 근교 상점, 마트 같은 곳에서 날짜가 간당간당해 판매가 어려운 물건들, 혹은 너무 많이 생산되어 처치 곤란인 물품/음식들, 혹은 지역의 농장에서 생산되었으나 소비자들이 원하는 모습, 그러니까 반듯하고 반짝반짝한 모습은 아니지만 품질에는 이상이 없는 그러한 아이들을 가져다 두고 멤버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너무 좋은 제도아닌가? 9천 원이면 사실 빵 하나, 음료수 하나, 그리고 야채 몇 종류를 사면 끝나는 금액이다. 한 번 보자 하는 심정으로 멤버십에 가입했고 받게 된 물건들은 이렇다.
삐뚤삐뚤한 당근 그리고 못생긴 애호박, 울퉁불퉁한 토마토, 너무 작거나 크기가 균일하지 않은 감자, 너무 작은 비트 그리고 속이 꽉 차지 않은 배추 씻으러 가기 직전인 콜리플라워 그리고 케일, 다양한 통조림들, 펌킨 파일 만들 때 쓰는 호박, 페이스트, 토마토 수프, 건조형 수프, 생선까스, 그리고 유통 기한이 간당간당한 애벌레 모양의 케익 등등등 그리고도 이렇게 많은 물품들을 계속 담아주는 것이다.
마치 부페처럼 칸칸이 품목별로 나눠진 진열대에서 이거 이것 중에서 어떤 걸 가져가시겠어요라고 물으면서 계속 골라준다.
캔은 어떤거 가져갈래? 토마토요!
당근은? 주세요!
감자는? 주세요!
비트는? 주세요!
콜리플라... 주세요!
생각에는 모든 걸 다 가져가고 싶을 것 같은데 다른 이용객들을 보니 어떤건 가져가고 어떤건 괜찮다고 패스 한다. 저 물품이 꼭 필요할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한 그들의 모습이 새삼 부럽기도 하다. 살짝 부끄러워진다.
파스닙은? 음...괜찮아요.
쌀? 괜찮아요.
이 뒤쪽 선반에서도 하나 고를 수 있어. 뭐 가져갈래? 이스터 에그 초콜렛? 레몬 드리즐 케익?
헉! 이미 한 철 지나버린 이스터 에그들이 이제 이곳에 까지 다 나왔다.
거의 축구공만한 크기로 9파운드, 그러니까 2만 원씩 팔던 대형 초콜렛, 대형 계란 모양 초콜렛들이 지금 여기서는 그냥 주고 있다. 시즌에만 소비되는 저런 음식들은 확실히 버려지거나 낭비되기가 쉬운 것 같다.
전부 상술인 거지 뭐.그나저나 나는 저 애벌레 케이크가 항상 궁금했는데 (거의 15,000원이라 비싸서 사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무료로 데려올 수 있었다!
시음해 보라며 장 건강 밀크도 주셨고, 그리고 필요한 것은 가져가라고 둔 무료 책과 비디오 코너가 있다. 글쎄 우리나라였으면 무료로 가져가세요. 코너에 저렇게 많은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긴 한데, 어쨌든 나도 사랑하는 '러브 액츄얼리' 디비디가 있기에 하나, 그리고 마음챙김 책 하나를 가지고 왔다.
나중에 나도 필요 없는 것이 있다면 가져다 둘 계획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트에서 일주일에 장 보는 것이 못 해도 15에서 20파운드. 그러니까 일주일에 정말 절약해도 2~3만 원은 그냥 사용하는데 여기 오니 한 2주치 음식을 받아가는 것 같다. 저렴하게 구매한 것도 좋지만 버려질 뻔한 녀석들을 구조할 수 있었던 점도 너무 마음에 든다. 매주 오지 않아도 2주에 한 번만 오는 것으로도 충분할 듯 하다.
참, 에그컵의 직원들은 거의 자원봉사자 분들인데, 저번 학기에 진행한 연극수업 프라임타임의 Mark아저씨도 여기서 봉사를 하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셔서 매우 반가웠다. 이런 작은 가게에서도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이 생기다니. 조금씩 이렇게 랑카스터에 스며들고 있는건가.
알뜰 소비를 한 스스로에게 뿌듯!
이렇게 뭘 많이 가져갈 줄 모르고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 낑낑대며 장바구니까지 하나 받아서 실었더니 자전거가 휘청휘청인다. 알았어 알았어. 안 타고 모시고 가마.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이 채소들을 잔뜩 때려넣고, 오늘 받은 토마토 통조림과 치즈를 이용해 저녁은 마녀 수프를 만들었다. 맛도 있고, 기분도 좋고. 내 지갑도 한껏 들떠했다. 하하하. 재미있다. 앞으로도 현명한 소비를 계속 이어가 볼 생각이다.
좋은 곳을 찾아낸 나 님에게 상으로 애벌레 초코케익을 꽁무니에서부터 매일 한 칸 씩 하사할 예정이다. 얼굴은 너무 귀여워서 맨 나중에 먹을 것이다. 일단 오늘은 신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