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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섯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고

숨이 턱턱 막혀오네

by Siho

드디어, 꿈만 같던 진짜 이삿날이 왔다. 자아 힘들던 시간은 끝났다고 복창해! 이젠 좋은 일만 생길거라고!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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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손이 가지 않는 일이 없는 나란 인간. 학생회에서 알고 지내는 박사 선배님이 새로운 집까지 짐을 실어다 주시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일전에 꽤나 치웠는데도 여전히 옮겨야 할 짐이 많다. 플랫 메이트 두 명이 다 붙어 두 번을 오가고 (얘들아 너무 고마워 엉엉) 작아보이던 차에 나의 짐이 테트리스 처럼 차곡차곡 실린다. 누가 보면 한 3년은 산 줄. 아이고 이 사람아. 이사갈 거 생각해서 이제 짐 좀 줄이자!


짐이 많다 = 민폐 캐릭이 된다 >> 공식 기억해!


기숙사에서 짐차를 타고 부웅 달려 새 집에 내렸다. 짐을 끼잉끼잉 옮기는데 누군가 집에서 툭 튀어나와 악수를 청한다. 어려보이는 얼굴에 단발을 반 묶음 하고 수염을 길렀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풍기는 아우라였다.

"난 매튜(Mathew)야. 네가 시호지? 온다고 이야기 들었어. 반가반가~(당연히 영어로 말했다)"

"어, 응. 응."

"짐이 많네? 하하하. 방이 꽉 차겠는 걸?"

도와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그렇게 인사만 하고 부엌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하하.


집을 구할 때 나와 있는 정보로는 이 집에 나 말고 남자 세 명이 더 살고 있다고 써 있었는데.. 둘은 어디갔지.

"저런 친구들이랑 같이... 사는 거에요?"

짐을 옮기던 선배가 걱정되는 듯 말을 건넨다. 하하하. 저런 친구들 이라니 뭘까. 하튼 뭐, 네 그럴 예정입니다만... 선배야 한달에 160만원을 내고 스튜디오에 살고 계시니 여러명과 복작이는 이 상황이 꽤나 답답하시겠지만서도 저는 펀딩을 받지 않는 일반 유학생 쪼무래기 입니다 녜... 저는 그래요...


가뜬하게 짐을 다 옮겨준 선배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고 떠났다. 늘 그렇게 존대를 하신다. 아니, 그보다도 저 이제 안보시려고 그러는거에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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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이다 내 방!!!!!

세상에 이게 이렇게나 기쁠 일인가. 으아아아 이 짜릿한 햇살이며, 널찍한 침대며 이게 사실인가. 실화인가!!!

펑펑 울고 싶었지만 찌들대로 찌들어 마음마저 가물었는지 눈물도 안나온다. 눅눅이 시호가 이래서야 될일인가. 아이고- 모르겠고 그냥 내 침대에 눕고만 싶다. 우선은 좀 치워야 하는데 뭐부터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린다.

"시호?"

매튜가 방문을 끼익 열더니 반가운 얼굴을 하고 섰다.

"응, 왜?"

"너 이거 좋아할거 같아서. 나름의 입주 선물? 으핫핫핫핫!!"

그렇다. 사진에 보이는 저 위화감 드는 빨간 봉지. 그는 나에게 신라면을 건네고 다시 사라졌다.

묘한 캐릭터일세... (나중에 알게 되지만 매튜는 음식, 정확히는 요리에 어마어마어마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의 반 이상을 부엌에서 요리하느라 복작인다. 난리 부르스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한국음식도 엄청 좋아하는 편. 나보다 한국 라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똑똑. 누가 또 문을 두드린다.

"매뜌?"

"아니, 나야 케빈"

아, 케빈 아저씨는 집주인이다. 엄청나게 큰 키의 영국 아저씨. 한 번 입을 열기 시작하시면 설명이 끝이 없지만, 통화에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역시나. 그래도 좋아 보이는 인상에 이 집을 고른 것이기도 하다.

"짐 들고 온다고 고생했어. 나는 아직도 부엌 치우는 중이야. 이따가 이것 저것 설명해줄게. 우선, 매뜌는 만났지? 쟤가 여기 가장 오래 살았어. 나름은 터줏대감이랄까. 그리고 에드(Ed), 릭(Rick), 나스(Nas)도 있는데... 차근차근 소개해 줄게. "


"네... 방 청소는 제가 해야 되는 거지요(흠. 왜 뭔가 위화감이..)?"


"아이고, 내가 치워 둔다는게... 미안하게 됐네. 부엌을 다 갈아 엎고 새로 치우고 있어서... 알다시피 남자 다섯이 복작이다 보면... 뭔 말인지 알지?"


"네? 다섯이요?? 아까 분명히 매뜌랑 에드, 닉, 나스...그럼 네명이 아니에요?(아니 세명이라고 써있었잖아!) 아저씨도 함께 사나요?"


" 아니아니. 난 좀 멀리 살고. 사실 한 명이 더 있는데, 사는 건 아니고 매뜌 친구인데 가끔 오가는 정도야. 신경 안써도 될거야"


"다섯...아니 분명히 제가 방 구하는 웹 사이트에서는 세 명이라고 봤는데"


"아, 그거는 옆 집이야. 옆 집도 내 거거든. 내가 매물을 잘못 올렸나보네 하하하, 어쩌겠어? 하하하"


그렇다. 이 3층 집에는 나까지 모두 여섯. 그리고 남자는 다섯이 살고 있는 것이다.

아아. 웹소설로 치면 굉장한 로맨틱 (코메디) 물이 예상되는 인물관계도 이긴 한데... 섣부른 기대는 버리자. 여기는 영국이야.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수 없다고! (편견 아님 ) 아니, 나도 평범하진 못하지 음.


쉬다가 풀다가 쉬다가 풀다 하다보니 짐을 반 쯤 풀었다. 아. 조금 지치는 듯도. 아무래도 앞에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먼지가 많아서 그런가 좀 답답하네.


"저기, 케빈 저 잠깐 산책 하고 오려는데 집 열쇠를 주시겠어요? 방 열쇠랑요"

"아, 내 정신좀 봐"

부엌에 쭈구리고 엎드려 걸레질을 한참 하던 케빈은 끄응차 하고 일어나더니 주머니를 뒤진다.

"얼레?"

아... 어째 불안한데.


"이게 어디갔지? 매뜌, 너 시호네 방 키 가지고 있니?"

"그게 왜 저에게 있겠어요. 하하. 방 어딘가 있겠죠"


"시호, 정말 미안한데 방 열쇠가 없네. 황당하네."

"그럼 어떡해요? 저 밖에 못 나가고 계속 안에 있어야 하나요?"

"그건 아니고... 우선 내걸 다 주고 갈게. 나중에 복제 해야겠다. 하핫!"


아니 아저씨... 그렇게 웃음으로 때우시면 안되죠....하아... 어쩐지. 난항이 예상된다.

우선 열쇠를 받아들고 집을 나서려는데,

"아참, 시호! 기억해야 할게 있어. 네 방문은 조금 오래 된 방식이라 이렇게 이렇게 중간 걸쇄를 올려 두지 않으면 문이 자동으로 잠겨버려. 항상 키를 가지고 다니거나 해야해. 알겠지?"

"눼..."

"그리고 밖에서 대문을 열 때도, 자 봐봐 이렇게 한번에 훅 돌리면 안되고 살살 당기는 듯 하면서 밀어서 돌려야 돼"

"뇌..."

이너므 집은 열쇠 하나 잠그고 여는데도 이렇게 정교한 스킬이 필요한 것인가.


아우. 집을 너무 급하게 골랐나. 아까의 들뜸은 어디로 가고 또 머리가 살살 지끈거리려고 한다. 아냐. 이제 더 찾을 집도 없고 여력도 없어. 여기가 그냥 내 살집이야. 적응하자.

어거지로 발 걸음을 떼는 내 앞에 작은 돌담길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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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바로 앞에 편의점, 그리고 아주 큰 시민 공원이 있다. 덩달아 꽃도, 새도 많다. 재잘재잘.

여기, 꽤 좋잖아?

됐어. 이정도면 된거야. 공원 산책도 가끔 하고... 주말에는 커피 한 잔 들고 벤치에 앉아서 독서도 하고... 꽤나 괜찮잖아? 소위 럭키 V 비키잖아?


어디까지 걸었을까. 따사론 햇살이 지긋이 어깨를 누르는 걸 보니 돌아갈 때가 되었나보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시 돌아왔을 때 집엔 아무도 없었다. 케빈도 돌아간 것 같고 매튜도 요리를 끝냈는지 부엌도 잠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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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 아이맥도 설치하고, 음악도 틀어 두고. 어쭈? 차도 한잔 내려 흥얼거리며 방을 치운다. 내가 사랑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블라인드 사이로 촘촘히 내리쬐는 노을이 한 껏 기분 좋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다'


에라이. 낭만이라고는 없는 마흔미혼 같으니.

부엌에 가서 신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 겠다하고 문을 열려는데

철컥,

응?

철컥철컥. 아 이 방향이 아닌가? 아- 아까 아저씨가 말한게 이건가? 아니 그건 내가 밖에 나갈 때고, 나는 방 안에 있는데 이게 왜 안 열려??

철컥철컥 철컥, 툭-

뭔가 끊기는 불안한 소리가 나며 방문은 아주 굳게 잠겼다.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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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철컥,

거기! 누구 없어??? 매튜!!! 케빈!!!

안돼!!!!!!!!!!!

어쩌지? 어쩌지? 케빈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어차피 여기 살지도 않고, 열쇠도 없잖아.

매튜는?? 아 아까 번호라도 받아둘걸!! 으으 어쩌지?

나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쩌지? 이제 어쩌지? 정말 낭패다 아아아아 그야말로 눈물을 쏟고싶구나- 하며 문을 철컹대고 있는데.


"헬로?"

매뜌와는 다른, 뭔가 물에 살짝 젖은 듯한 (외람된 표현 죄송) 목소리가 들린다.


"아, 살았다. 거기, 누구야? 나 문이 잠겼어. 도와줘 제발!!"

"이런, 큰일이네. 그런데 나는 네 방 열쇠가 없는데 어떻게 열어주지?"

"몰라!! 나 좀 꺼내줘!!!"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징징대기 시작했다. 이러다 작은 일이 아니라 큰 일이라도 갑자기 마려워온다면... 거의 소멸되다시피한 내 사회적 지위며 나의 자존... 다 사라져 버릴 터! 이건 안됄 말이다.


"우선, 네 열쇠를 창문으로 해서 밖으로 던져봐. 내가 받아서 어떻게 해 볼게"

"알았어. 고마워"


나는 이리저리 열쇠를 찾아 헤맨다. 이게 어디갔지??


"찾았어?"

"아니, 잠깐만.. 열쇠가..."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없었다. 주머니, 에코백, 신발장... 뭐지? 어디간거지? 이 집은 열쇠에 저주라도 붙은건가.


"열쇠가 없어! 분명히 아까 열었는데. 잘 안 열려서 엄청 고생해서 열었다고. 엉엉엉 나 어떡해~~"


"진정해. 문을 어렵게 열었다고? 그럼 혹시..."

얼굴을 모르는 상대는 끼익하고 중간 문을 열고 나가 대문을 연다.


"여깄다!"

뭐라고?

"너, 대문에 열쇠를 그대로 꽃은 채로 집에 들어왔네. 하하!"

"뭐??? 내가???"


아. 그렇다... 아까 대문하고 실랑이를 한참 하는 통에 문이 열리자마자 열쇠도 다시 안 빼고 집으로 뜀박질 해 들어왔었지... 나란 인간은 대체.


철컥철컥. 달칵.

문이 열렸다.

금발의 곱슬 머리를 한 건장한, 파란 눈의 청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으아아앙-"

나는 갇힐 뻔 한 암담 한 상황에서 구출 된 것이 너무 기뻐 그를 안아버릴 뻔 했다. (거의) 하지만 황급히 정신을 차려 재빠르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으로 대체 했다.


"해냈어! 하하하, 첫 날 부터 고생이네. 네가 시호구나?"

"으아아아아앙- 정말 부끄럽다!!!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쉿!"

"나 화장실도 못가고 갇혀 죽는 줄 알았다고~"

"하하. 그랬을 듯. 여하튼 나는 에드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반가워"

"나, 나는 시호야. 반가워"


에드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상하게, 갑작스럽게, 민망하게 이루어졌다. 씨잉.

럭키 비키는 무슨.

럭키가 비키고 있네.


첫날부터 이렇게 대꺼리를 신나게 했으니

내일은 무난히 지나가겠지? 부디. 무탈하게. 열쇠 있이. 방문만 안 잠기게 해주소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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