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아 두껍아 제발 새집 다오
봄이다. 봄.
봄을 즐기느라 연재도 깜박 할 정도로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 따사로운 봄,
드디어 이제 나도 갈 곳이 정해진다.
저렴하고 위치도 좋았던, 그래서 원래 가려던 집도 스톱을 걸어둔 채 내가 양다리를 걸치려던 그 집.
인도친구들과 이렇고 저렇게 얽혀져 살려던 그 집.
보증금을 보냈고, 계약서가 도착했다.
음? 이상한 구절들이 눈에 띈다.
집주인은 임의대로 계약 내용을 바꿀 수 있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원할 때 아무때나 나를 내보낼 수 있다고 ? 이게 무슨 말이지.
학교와 밖에 거주 계약을 체결해 보지 않았던 나는 이 계약서가 영국의 기본 계약서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오, 이럴때 쓰라고 지피티가 있는 것 아니겠나!
나는 챗 지피티에게 개인 정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보여주며 이게 공정 계약인지 물었고, 지피티는
세입자인 나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는 계약이라고 정확히 짚었다. 그럼 그렇지! 나는 해당 부분들을 고쳐 달라고 정중하게 집주인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이거 영국 기본 계약서야! 그리고 변호사가 다 작성한거라고. 여태 한번 도 문제가 없었어. 싸인해. “ 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학교 친구(50대) 콜 에게 연락했다. 내용을 보여주며 이게 부당한게 아닌지 보내둔 뒤
내가 가끔 의지하는 영국 석/박사 단톡방에도 물어보았다. 역시나 그들은 불공정하다며 무료 법률상담을 받아서라도 이 부분은 고쳐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생각도 그래요!
그리고 나니 아차! 안토넬라 아주머니가 계시지? 마음챙김 바느질 교실에서 만난 안토넬라 아주머니 (이탈리아분)는 랭커스터에서 20년간 학생들에게 방을 빌려주었던 집주인이었다. 여기만큼 확실한 곳이 없지. 나는 아주머니께도 물어보았다. 남편 분인 닉 도 함께 내 계약서를 검토해 주었다.
그런데 웬걸?
안토넬라도, 콜도 이 계약서는 그냥 평균, 그러니까 일반적인 계약서라는 거다.
원래가 영국은 이렇게 세입자가 주권이 없는건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들 그렇다고 하니 그냥 다음단계로 넘어가기로 한다. 계약서야 괜찮더라도 입주전에 문제가 될 것 같은, 보수가 필요한 모든 부분을 다 사진을 찍어두고 시정을 요청해야 나중에 내가 뒤집어 쓰지 않는다! 이건 필수다! 라는 조언에 따라 내가 방문했을때 찍은 모든 사진을 정리하고 고칠 부분 - 뜯어진 벽지,/ 새로 구매해야 하는 부분- 비틀거리는 의자 / 청소해줘야 하는 부분 - 털로 가득한 매트리스, 커피 얼룩진 카펫, 먼지쌓인 걸레받이, 곰팡이 슬은 천정 등.
쓰고 보니 사실 문제가 많긴 많았네. 괜히 싼게 아니었겠지.
메일 전송 완료.
이제 약 4-5일 정도면 나는 깨끗하게 고쳐진, 새로운 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드디어!!! 안정을 찾을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하지만 계약서도 안 고쳐준 주인이 저 요구사항들은 순순히 들어줄 것인가 하는 우려는 마음속에 약간 있었다. 밥을 먹고, 와인을 한 잔 따르고 있는데 뜨릉, 메일이 도착했다.
“시호.
메일은 잘 받았어. 네가 아직 입주하지 않았으니 이 계약은 취소 하려고 해. 너의 메일에 따르면 고쳐야 할 부분이 집에 너무 많은 것 같네. 누구를 들이기에 준비가 안된 것 같아서 이 것들을 우선 다 고쳐야 할 듯. 보증금 환불 절차를 밟도록 할게. 좋은 곳 구하길 바라며 … ”
뭐라고??? 아니 이제 사나흘이면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지금 이렇게 취소를 한다고?
나는 아래 내용을 더 읽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메일 읽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죠?”
“뭐, 내용 그대로야. 고쳐야 할 부분이 많아서 지금으로선 손님을 받을 수가 없어. 네가 지적한 대로”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죠. 고치는 건 제가 사진을 보내기 전에 집주인이 알고 있어야 하는 부분 아닌가요.”
“네가 사진을 보내주기 전에는 이정도 까지 심각한 줄은 몰랐는데, 보니까 곰팡이도 있고 뭐가 심각하네. 2-3달은 걸릴 것 같아. 카펫부터 해서 전부 다 갈아 엎으려고해.”
“아니 그래도 제가 갑자기 다른 곳을 어떻게 구해요. 그냥 제가 들어가서 치우고 살게요”
“노우, 나는 굉장히 책임감 있는 집주인이고 (그러면 진작 좀 치워 두시던가요…), 이건 너의 건강에도 관련된 문제야. 나중에 환기구 더러워서 폐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하면 다 내 책임이 될거라서 그렇게는 안되”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집을 구하는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건 내 사정이 아니야. 여튼 난 보증금 환불 과정을 밟을게. 오케이? 주말 잘 보내”
툭 .
전화를 끊고 나서
내 멘탈도 툭.
아… 아무리 영국살이 녹록찮기로서니 입주 나흘 전에 파토를 놓다니. 역시 너무 까칠하게 군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런데 이 정도는 다 체크 하는게 기본 아닌가. 목청에서 욕설이 절로 춤을 추지만 밖으로 내뱉지는 않기로 한다.
뜨릉-
메일이 하나 더 도착한다. 이젠 기대도 되지 않는군.
이런, UPS잖아?
“당신이 보낸 소포를 다시 리턴 하려고 합니다. 리턴 수수료 58파운드(11만원 가량)을 재 결제 해주세요. “
자기들이 제대로 배달 못 해 놓고 리턴 비용은 보내는 비용의 두 배 라니.
Just Perfect. 그래. 완벽하구나 완벽해.
아무것도 안 해도 계속 돈이 새어나가는 이 마법. 주저 앉고 싶지만 아직도 주저 앉을 수 없어. 집 새로 구해야해.
집을… 집을…
그래, 처음에 홀딩해 둔 두번 째 뷰잉한 집 주인 아저씨에게 다시 연락 해야겠다.
홀딩해 달라고 하고 거의 2 주가 지났는데. 그래도 아저씨가 당분간은 딸 결혼식으로 바쁠거라고 했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아, 맞다. 다른 세입자가 들어오면 그냥 받으라고 했는데 그새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으면 어쩌지…
전화 안받으면 어쩌지… 그럼 다시 어디부터 어떻게 집을 구해야 하나.
“Hello?”
“오, 케빈? 저에요 시호.”
"응, 마음을 결정했나요?"
"네, 저 나흘 뒤에 바로 갈게요! 계약서 보내주세요"
"오케이. 알겠어요. 광고를 내려두고 그동안 다른 손님은 받지 않고 기다렸답니다. 이것 저것 요청할 정보들을 보내둘테니 나에게 메일로 보내줘요"
"네! 감사합니다!"
휴우우우우우우우.
크게 한숨을 쉰다. 다행이다. 바람도 찬 데 길거리에서 자지는 않아도 되겠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아저씨 감사해요. 집이 아무리 후져도 그냥 입 꾹 닫고 살게요. (이건 보장은 못 함)
감사해요. 감사해요. 기다려 주셔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이사는 다음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