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꼴이 우습다 서럽다 하오
감동의, 격동의, 다사다난의 반 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학기 끝. 여행도 끝. 이제 정말이지 크나큰 한 가지가 남았다. 바로 새 집을 구하는 것.
나는 왜 굳이 잘 살고 있던 기숙사에 "나 일찍 내보내줘!" 라고 요청했을까.
3주 전의 나의 결정이 이제와서 조금은 후회도 된다.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들도 (청소를 잘 안하지만) 편하고 좋은 친구들이고, 학교와 가깝고, 다 좋은데 왜?
비싸. 몹시 비싸.
시내의 숙소들 월세가 한달에 싸게는 85~100만원 선인데 비해 학교 기숙사는 120-140선이다. 5개월이면 거의 600만원인 셈이다. 많게는 100만원 차이가 나다보니 이 부분이 걸렸다. 게다가 이제 학기가 다 끝나 일주일에 한번 정도 있는 슈퍼바이징을 제외하면 학교에 올 일이 거의 없다는 점도 크다. 사실 프레스턴이던 맨체스터던 어디 살던 그만인 시점이다.
그래서 그렇게 대차게 [나 계약 여기까지만 할래!!] 라고 오피스에 메일을 넣었지만 아차, 여기는 영국이었다 . - 그렇게 호락호락 계약에서 내보내 줄줄 알았니?- 쉽게 놓아줄 거라 생각한 학교는 생각보다 다각도로 나를 위해(?) 주었다.
'시호. 아마 네가 돈 관리를 잘 못해서 이렇게 기숙사 비도 내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머니 어드바이저를 우선 만나고 와, 그러고 나서 우리가 소견을 참고할게'
아니...그냥 인컴이 없다고요. 것 참.
다음 날 만난 머니 어드바이저는 소비를 줄일 것을 조언했지만 시내 외출 조차 거의 안하는 기숙사 집순이인 나의 지출이랬자 너무 빤했다. 식비. 몇번의 차비. 핸드폰 비 끝. 단촐한 나의 가계부를 보더니 머니 어드바이저가 한숨을 푹 쉰다.
"쉽지 않아 보이네. 기숙사 오피스에 메일 보내줄게"
야호! 나의 생활비에 답 없음을 승인받았다 (?????)!!!
"그런데, 이렇게까지 생활이 어려우면 분명 멘탈적으로도 불안정할텐데, 우리 학교에 상담사 있는거 알지? 너의 마음 상태에 대해 상담을 좀 받는게 어떨까??" 머니 어드바이저가 어드바이징했다.
아뇨. 괜찮아요. - 이건 만성이라 익숙합니다 라고 까진 하지 않았다 - 가끔 웰빙센터 가서 프로그램 참여하고 그래요 하하하. (머쓱머쓱) 하면서 얼렁뚱땅 넘겼다. 상담인증까지 받아오라고 했다가는 영영 기숙사에서 못 풀려날 것 같았다.
"그래, 뭔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이야기 하고! 여기 이거, 가계부 액셀 파일인데 내가 메일로 보내둘테니 앞으로는 이걸 사용해봐. 꽤 편해!"
고맙게도 이런 저런 서포트를 해주는 머니 어드바이저. 따뜻하지 까진 않지만 여러모로 뭔가 위로받은 느낌이다. 이제 나는 왜 일찍 기숙사에서 나가야 하는 지, 재정형편이 어떻길래 더 싼 곳을 찾아야 하는건지, 그러면 학비는 낼수 있는건지 등 을 기숙사 오피스에 조목조목 증빙해야한다. 수업준비도 이 정도까지는 안하겠다 싶게 철저히 서류를 만들었다. 나의 헐벗은 계좌 증빙 까짓거 얼마든지 해드리지.
오피스에서 오래 고민하지 않게 그들이 선택할 옵션도 아예 미리 써서 보냈다.
하이.
홉디스메일파인쥬웰(꼭 들어가야 한다)
자 이러저러해서 이러저러해. 오늘 상담도 받았어. 그리고 너희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1. 4월 8일에 나를 내보내 주고, 28일까지로 내가 기숙사 비용을 이미 냈으니 20일치를 보증금과 함께 다시 돌려주는 것
2. 돈을 이미 낸 4월28일까지 살게 해주고, 그 이후 내보내 주는 것. (계약기간은 7월말까지였다)
이로써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 학교측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휴. 기숙사 탈출이 정말 쉽지 않다.
하루하루가 이러니 내가 논문에 집중할 수 있을리가 만무하잖아?
일 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기다리던 메일이 왔다!!
너를 계약에서 내보내주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내용. 와우! 게다가 첫번째 옵션인 8일까지로 계약을 마무리 해주겠단다. 신난다. 와! 와! 8일! 다음주. 다음...주? 뭐야? 6일도 안남았다고???????
어...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다.
사실 대학이나 기관, 기업등에서 돈을 다시 돌려주는 예가 엔간하면 잘 없어서 당연히 옵션 2를 선택해줄거라고 생각하고 넋놓고 있었는데 졸지에 일주일만에 집없는 떠돌이가 되게 생겼다. 안돼!
눈에 불을 켜고 집을 찾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스펙터클 하고, 급박할 수가 있나. 4월은 온전히 에세이 쓰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잔잔하고 평온한 생활을 만드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니. 아니, 내가 초래한건가. 삐용삐용, 그 어렵다는 '(외국인 신분으로) 영국에서 살 집 찾기' 미션에 드디어 나도 돌입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집을 보러 간다고 연락하면 부동산에서 달려나와 집을 보여주고 최대한 빨리 성사가 될 수 있게 중개인들이 팔을 걷어부치지만 여긴 좀 다르다. 학생들은 학생 숙소를 주로 알선해 주는 스튜던트 어코모데이션 업체를 통해 숙소를 구하기 마련인데, 이 업체들이 말하는 학생은 만 35세까지로, 마흔인 나는 이미 여기서 아웃. 씁쓸.
그렇다면 집주인과 개인적으로 연락해 들어가는 방법만이 남았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다. 당연히 버짓이 여유롭다면 부동산에 찾아가서 '나 이만큼 돈이 있고 이만큼 살 테니 괜찮은 방을 주시오' 하면 - 한 달에 한 130에서 150만 원 정도면-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엔 해당이 되질 않고.
어렵사리 몇 군데 뷰잉(Viewing)*을 잡았다. 뷰잉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집주인과 함께 집을 둘러보는 것인데, 사실 한국에서야 손님이 갑이고 부동산이나 집주인이 빨리 팔고 싶어 안달이지만 여기는 반대다. 집주인이 갑이다. 때문에 뷰잉을 하기 전부터 이미 나에게 질문이 많다.
- 원래 살던 곳 집주인의 보증서같은 거 있니?: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 살면서 사고를 쳤나 안 쳤나, 괜찮은 숙박인이었나 아니었나 같은 것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얘기다.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 피곤하달까. 뭐 이런 제도 때문에 다음 렌트할 곳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이 수월하기 위해서라도 있는 동안 별 사고를 안(덜) 칠테니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기숙사에 살았었으니 이것을 수월히 얻었다.
- 학교는 어디니? 전공은?
- 돈은 어디서 나서 내는거니? 안 밀릴 수 있니? 등등. 생경한 경험이다.
첫 번째 집을 찾아가 보았다.
가격도 괜찮고 나름 위치도 좋아 보였는데 막상 들어가니 집이 너무 낡았고 좁았다.
그리고 내가 들어갈 방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이 마침 있길래 '방이 춥지는 않냐'고 물어보자.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는 추운 것을 즐긴다고 하더라. 응 춥다는 말이지. 여기는 패스. 생각보다 싸다 했지...
터덜 터덜 학교로 돌아온다.
날은 야속하게도 너무 좋다. 영국 답잖게 요새 날씨는 왜이리 좋은거야? 햇살은 왜 이리 따사로와?
이렇게 좋은 날씨에도 마음에 심통이 가득 고이는걸 보니 지금 내가 뭔가 꼬이긴 했는가보다.
잔디밭에 벌러덩 누웠다. 아... 날은 참 좋은데. 나는 곧 집이 없어 질텐데. 곧 햇살도 사치일텐데...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나 한국 가면 따뜻한 집이 있는데. 예서 뭘 하나.
잔고에 남은 7,370원에서 지금 무슨 희망을 보고 있는가.
에라. 또 잡스러운 생각만 몰려온다. 이러기엔 날이 너무 좋다. 엉디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가자! 집으로.
>>>> FF
며칠이 지나 두 번째 집을 찾아갔다. 이렇게 글로는 간단히 적지만 두번째 집 뷰잉 약속을 잡기까지 1주일이 더 넘게 걸렸다. 집주인들이 보통 집에 거주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멀리 사는 경우도 많고 해서.
위치를 빼면 이곳은 꽤 괜찮은 축에 속했다. 시내에서도 더 외진 북쪽에 위치한 이 곳은 학교에 한 번 가려면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야 한다. 이러다 학교에 가기가 점점 귀찮아지는거 아닐까? 아직 스포츠센터도 4개월이 넘게 남았는데 말이지. 1층인 것도 약간 걸리긴 하지만 햇살이 잘 들고, 같이 사는 거주인들이 전부 직장인이라 9시에서 6시까지 아무도 없다는 점은 꽤 마음에 든다.
이 집으로 이제 진행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집주인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 그간 답신이 없던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보러 올래요?"
여기는 사실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깜짝 놀랐던 곳이다. 위치도 좋고 시내와 학교의 중간에 있을뿐더러 일주일에 18만 원이라니... 기숙사에 비하면 무려 반 값이다.
다음 날로 약속을 잡고 찾아가 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커리 냄새가 진동한다. 음 아마도 인도 친구들이 살고 있으려나. 넘겨짚어 보는데 역시나 적중했다. 이곳은 베트남 친구 한 명, 인도 친구 2명, 그리고 현재는 여행을 떠난 리투아니아 친구 1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쓸 방은 2층. 6개월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던데 방이 꽤나 지저분하고 관리도 많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해가 잘 들고 전망도 좋고 집 앞 화단에 무언가를 키울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화단에 담배꽁초가 가득한 모습에 기겁했지만, 내가 입주하면 틴을 만들어 알아서 치워준다고 하니 그건 고마운 일이다.
아마도 이 집으로 결정 하게 될 것 같다. 가격도 세이브 되고 조용한 환경도 좋아 보인다.
집을 정하고 나니 드디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정말 짐들을 정리할 때구나.
6개월밖에 안 살았는데 왜 이렇게 짐이 많은지 한국에서 보내온 짐, 올 때 가져온 짐, 겨울방학에 갔다가 들고 온 짐... 이사 박스로만 3개, 4개, 아니 5개가 될 셈이다. 나는 정말 맥시멀리스트였구나.
웃긴 건 3-4 박스를 쌌는데도 방 상태가 그대로라는 거다. 바꿔 말하면 이 네 박스만큼의 짐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무래도 풀 소유에서>> 미디움 소유 정도로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동이 잦은 내 삶의 특성상 이렇게 많은 짐은 뭘로 보나 도움이 안 된다. 공간이 곧 돈인데.
압축, 또 압축을 거쳐 싸놓은 짐을 하나는 이 친구 집에 하나는 저 친구 집에 맡겨 두었다.
어느 덧 기숙사에서 마지막 밤이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오랫동안 탄 차를 폐차장에 보내는 기분처럼.
사람도 아닌 이 방이라는 공간, 냄새, 그리고 버리고 갈 물건들에 괜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앞선다.
즐거웠던, 그리고 고생했던, 힘들었던 기억들이 스친다.
참 괜찮았는데. 그냥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아유. 왜 벌써 넘실대는 거야?
그래도, 이제 갈 곳이 정해졌으니, 그리고 짐도 다 보내두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런던의 지인 집에서 맘 편하게 공부하다 오면 되겠지. 그렇게 애써 마음을 먹어보지만 무언가 이전과는 다른, 편안하지 않은 느낌이 계속 맴돈다. 왜 그런지 여행 이후 몇 주를 마음이 이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계속 붕 떠 있는 듯 하다. 마무리가 어려웠던 학기 말 상황 때문일까, 계속해서 나의 심신 안정을 패대기 치는 유럽국가들의 배송 대처 때문일까, 아니면 그 결과로 아직도 오지 않고 있는 소포 때문일까. 그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본의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어버린 나의 구차한 모습들 때문일지도.
이 기간을 잘 버텨야 되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그리운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한국의 편리함, 편안함, 합리성, 효율성, 모든게 빠르게 해결되던 모습들이다. 분명 그 미친 속도가 싫어서 여길 찾았는데 이러다 한국에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릴까 봐 겁난다. 사실 집이 잘 안 구해져서 뷰잉도 조차 안 성사될 때 한국에 들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차피 공부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고, 집도 없는 데다가(!) 이제 수업도 다 끝났는데 뭐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있나... 하지만 아직 논문을 위한 전시와 퍼포먼스가 남았기에 당장은 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
빨리 어딘가에 안착을 해야 할 텐데, 이 모든 게 글감을 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긍정회로를 돌려보지만, 내가 이 일련의 사건들을 글로써 씻김 한 후, 다시 내 할 일에 손을 모아 집중할 수 있는 만큼의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요새는 조금 버겁다는 느낌이 든다. 버겁다. 그래 그 표현이 맞겠다. 사실 멈출 수 있다면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고 싶기도 하다.
방학이 길어서일까.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이 자꾸 생각난다. 공연을 만들고 싶고, 공연을 보고 싶고 글을 쓰고 싶다. 어쩐지 지금 나는 논문을 쓰고 싶지 않다. 연구하고 싶지 않다. 봄, 타는 겐가?
넘실대는 이 봄을 무사히 넘겨야 할텐데. 내 맘은 아랑곳없이 꽃은 또 저렇게 화알짝 제 모습을 뽐내며 피고 말이지. 거 참 어려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