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탕과 열탕사이
아침이 밝았다. 버릇처럼 옆 침대를 바라보지만 엄마는 한국으로 가고 없다. 잠깐 슬퍼지려다가 마음을 다잡는다. 이러지 마. 너 오늘 그럴 새 없어. 이따가 짐 찾으면 그때 울어도 울어.
눈을 비비고 거실로 나선다. 아침부터 춥지도 않으신지 웃통을 허옇게 드러내고 반바지(로 추정)만 하나 걸친 할아버지가 식탁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계신다.
"본... 죠르노 (이태리 아침인사)?"
"본 죠르노! 잘 잤니?"
반갑게 인사하는 할아버지와 즐겁게 농담 따먹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나의 머릿속은 그저 캐리어를 빨리 받아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이 그득했다.
"네, 잘 잤어요. 저어. 그런데 혹시 제 캐리어는 온다는 연락 없었나요..."
"전혀. 오늘은 오려나 했는데 조회해 보니 아직도 Calpi에 있는 것 같다"
힘이 쭉 빠진다. 아직도 거기에 있다고? 도대체 Calpi는 뭐 하는 동네야... 아침부터 혈압 상승.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제 막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있는 아저씨를 다시 한번 졸라 UPS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노래와 자동응답을 번갈아 가며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교환원이 전화를 받았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은 할아버지는 "칼피(택배 보내기 전 세관 선적장소)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나 봐. 월요일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그러는데?"라며 황당해했다. 나 역시 황당과 동시에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또! 다음 주로 넘어간다는 건가. 도대체 이태리 택배는 뭐가 이 모양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이탈리아 우편, 세관은 까다롭고 복잡하기로 유명하더라. 알았으면 이렇게 안 보냈지)
창 밖을 보니 주룩주룩, 비까지 온다. 자알- 한다. 이놈의 로마. 이놈의 UPS! 괜히 로마까지 미워지려고 한다. 결국 하루 더 있은 보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짐도 없고, 비행기는 날렸고. 거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낙담하고 있는데 할아버지의 친구 -라고 하는데 친구라기보다는 약간 조카뻘로 보이는 쿠바 언니-가 강아지 산책을 마치고 부스럭부스럭하는 종이봉투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하고는, 커피 한잔 하겠냐며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는데, 이 와중에 그렇게 향이 좋을 수 없었다. 열린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비 냄새와 천천히 섞여가는 에스프레소 향기... 흐르는 시간을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눈을 감고 이 향기를 영영 마시고 싶다.
홀짝홀짝, 현실로 돌아와 잽싸게 두 모금을 하고는 각성하고 있는 나에게, 막 구워낸 듯한, 봉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것 만 같은 피스타치오 크로와상을 하나 꺼내 내미는 언니.
"이거 먹어. 달콤한 걸 좀 먹으면 좋아"
평소라면 야채-단백질-지방의 순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음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을 테지만 나는 지금 응당 달콤한 것이 필요하고 말고. 받아서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와이앙. 너티하고 파삭한 이 질감... 겹겹이 쌓인 버터에서 풍겨 나오는 그 고소한 향기... 맞아. 나는 이태리에 있었지.
잠시 기분과 뱃속을 충전했으니 되었다. 이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사자.
음. 역시나 임박이라 매우, 많이, 비싸다. 그래도 언니와의 약속이 있기에 가야한다. 알고 보니 원래 어제 런던도착 일정이었기에 오늘 일자로 뮤지컬도 예약했었네. 아쉽지만 이건 볼 수 없게 되었다. 25파운드(5만 원) 안녕... 그리고 하루 더 있을 줄 알고 부랴부랴 빠르게 새벽부터 예약해 둔 로마의 게스트하우스 30파운드(6만 원) 도 안녕. 하루를 더 있다 갔다간 윔블던에서 만날 J 언니가 주말 공연을 못 볼 것이다. 그래선 안되지.
한 것도, 논 것도 없이 취소비용만 계속 줄줄 샌다. 허탈하고 어이없이 돈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이 죽일 놈의 UPS를 떠올리고, 또 한 번 이를 악 문다. 모두 내 탓이라고 하기엔 뭔가 억울하다. 분노를 삭이며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고 있는데 쿠바 언니가 나에게 다가온다.
"아침, 안, 먹어?"
- 이 분은 영어가 서툴러서 알아듣기가 좀 어려웠다. 엄마랑 있을 때는 일정도 힘들고 숙소에 들어오면 잠들기 바빠서 이야기를 나눌 새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쿠바에서 왔다고 한다. 세상에! 엄마가 알았으면 둘이 스패니쉬로 대화했을 텐데... 아쉽다. 할아버지의 부인이라기엔 다소 나이차이가 커 보여서 신기(?)했는데 알고 보니 이 할아버지의 친한 친구가 이 언니의 아버지였던 것. 어쩐지. 딸 뻘 같더라니-
배는 고픈 것도 같지만 계속 돈이 새는 걸 보면서 또 먹는데 돈을 쓸 순 없기에, 굶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자, 여기 봐봐" 쿠바 언니가 부엌으로 가더니 냉장고를 연다.
"이거, 냉장고, 여기 음식은 다 너 먹어도 돼. 내 냉장고이고 내 것이니까 " 더듬더듬 영어단어만으로 이어가는 말이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그 따뜻함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어제 내가 비행기를 놓친 것에 대해 측은지심이 든 것일까. 너무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나서 냉장고로 향했다. 계란, 치즈. 누가 로마 거주자 아니랄까 봐 치즈는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다.
흠, 밥을 해 먹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밥은 찾을 수가 없어서 두리번두리번거리자 방에 들어갔던 언니가 어떻게 알고 다시 나와 성큼성큼 부엌으로 온다.
"너, 밥, 안 필요해?"
"음… 사실 필요해요. 계란이랑 밥 조금 볶아서 먹으려고요."
언니는 부엌 찬장을 열더니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찾아냈다.
"이거다, 내 쌀."
아이코.
"My rice is your rice, Ok?"
언니가 작은 박스에 담긴 쌀을 촤라라라락 하고 라이스 쿠커에 옮겨 담았다.
그 순간, 그렇게 쏟아져 내리는 쌀알들을 보는데 갑자기 그간 힘들고 서러웠던 감정이 촤라락, 같이 쏟아졌다. 어휴. 마음이 힘든 것과 감동적인 것 둘 중에 하나만 하면 안 되나. 힘들다가 감사했다가, 힘들다가 또 감동했다가 변덕이 죽 끓이고 있으니 정말이지 힘들다.
냉탕, 열탕, 냉탕, 또 열탕.
사람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친절할 수 있을까. 언니는 필요한 게 있으면 노크하라며 손수 똑! 똑! 노크하는 시늉까지 보여주고 들어갔다.
"My rice is your rice."
사실 체크아웃시간도 이미 지났음에도, 이 짧은 한마디로 인해 나는 편안하게 그 공간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마저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며칠간 한 껏 찌푸렷을 나의 표정이 그녀의 한 마디와 그 웃음 띈 얼굴덕에 다시 펴졌다. 정말이지 나는 복 받은 사람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믈렛과 볶음밥 같은 것들을 만들어 먹고는 퍼져있다가 시계를 보니 앗, 전혀 여유롭지 않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이제 나가야 한다. 부랴부랴 짐을 싸고 우당퉁탕 문을 나서는데, 언니가 뛰쳐나와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힘내. 가방 꼭 찾을 거야. 꼭!"
에스프레소가 가운데 들어있는 페레로 사의 포켓 커피. 내가 이걸 좋아하는 건 또 어찌 알았지? 나는 초콜릿 두 개를 꼭 움켜쥐고 그녀와 진한 포옹을 나눈 뒤 발걸음을 재촉해 역으로 향했다. 비가 생각보다 세게 퍼붓기 시작했다. 흥, 이쯤이야. 영국생활이 나에게 알려준 고마운 버릇- '우산은 쓰지 않는다' . 탈탈탈 비쯤이야 가볍개 털어내고 공항버스에 오른다. 이틀 새에 공항을 두 번이나 가다니. 그래도 어제 돌아오던 버스에서의 종종거리고 서럽던 마음과는 한결, 아니 아예 다르다. 아침부터 내리쬔 친절과 배려덕에 힘들었던 나의 마음이 어느새 제법 괜찮아져 있었다. 차창밖으로 지나는 수많은 얼굴들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나도 언젠가 누구에게 밥을, 빵을, 초콜릿을 내어주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내 쌀이 곧 네 쌀이지 뭐"
이 한마디로 어쩌면 누군가를 서러움 혹은 외로움에서 잠시나마 끌어올려 줄 수 있을지도. 내가 그랬으니까.
*이 시간까지도 나의 캐리어는 Calpi에 있다. 한숨 푹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