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집어 치우고 싶은 모먼트.
2주의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이 이야기를 써야할 터다. 영국에 와서 좋았던 이야기들은 잔뜩 풀어헤쳐 놓았는데, 상대적으로 덜 좋았던 건 뭐가 있었을까.
사실 일전의 11화 [오늘은 처음으로 각 잡아 본다] 편에서도 이곳에서 일어난 어느정도의 불편을 언급한 적이 있고, 틈틈이(?) 글마다 약간의 컴플레인을 뿌려둔 터라,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기나 있을까. 고민아닌 고민을 하던 차였는, 데.
여 봐 란 듯 이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럼 그렇지, (언제나 글감을 내려주시는 글의 신께 감사하며) 정말 부끄럽고 민망했고, 되돌릴 수 있다면 이 사건 보다도 한 참 전으로 되돌리고픈, 그 이야기를 오늘 풀어야겠다.
초반의 에피소드에서도 다루었듯 미국 생활이 끝나갈 무렵, 나에게 찾아온 현타의 순간이 있었다. 지금 보니 꼭 반 년 정도가 지나면 이렇게 되는 것 같다. 평안한 삶의 대문을 쾅!!! 하고 구둣발로 부수며 들어오는 그, 예의 그 순간. 사실 이방인이자 외국인 학생인 내가 지닌 잠시의 평안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흔들릴 연약한 평온이라는것도 이번 일로 인정해야만 했다.
3월 말, 벌써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내 기준)굉장히 비싼 등록금을 냈지만 실질적인 수업은 10,11,1,2,3 월이 끝이다. 논문 슈퍼바이징을 빼고 계산한다면 수업료로만 한달에 8-900만원인 셈이다. 수업의 퀄리티는 그 정도 인가? 물으면. 음. 사바사.
이런 투덜투덜도 할 새가 없었다. 몰아치는 실습과 읽을거리, 리플렉션 노트와 로그북 작성 과제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 반갑게도 한국에서 짬이 난 가족이 나를 보러 (사실은 여행하러) 로마로 오는 일정을 잡았다.
부글부글_1) 이 시점 나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지는 모르나 최소한 졸업식이 있는 12월까지는 버틸예정이라 (아직도 6개월이 남았기에) 현재 살고 있는 학교 기숙사에서 조금 더 저렴한 사설 숙소로 옮기는 준비중이었다. 한 해의 중간부분이라 매물도 많지 않고, 이러저러 일들로 너무 할 일이 많아 집을 보러 다닐 시간도 여의치 않다. 물론 원래의 계약이 7월인지라 그 계약서에서 나를 빼달라고 학교에 요청하고- 승인 받는 과정도 3주가 넘게 걸렸다. 어휴.
이런 과정에서 한국으로 다시 보내져야 하는, 나에게 이제 필요없는 물건들이 많이 생겼다. 지금 가족이 온 편에 한국으로 보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정말 천문학적인 배송비를 지급해야 할 터였다.
가족과의 만남을 이태리에서 하고, 로마에서 각자의 살 곳으로- 나는 다시 랭커스터로, 가족은 백 투 서울로- 빠이빠이 할 예정이었기에, 이 짐들을 로마의 숙소로 미리 보내둘 참이었다. 가방의 무게가 꽤 되어 택배사에서의 픽업을 요청했다. 9-6시 중에 가지러 온다고 했다. 뭐? 아니 그건 거의 하루 종일 대기하란 이야기 아닌가? ... 어쨌든 공부할것도 있고 해서 그냥 투덜대며 기다렸다. 결론? 그 누구도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고객센터 채팅을 신청해 따졌다. (전화번호도 없었음)
'아니 가지러 오기로 했는데 왜 택배기사가 안오냐.'
고객센터의 응답은 그들의 Q&A세션만큼이나 단촐하고 심플했다.
"응, 간혹 너무 바쁘면 기사들이 가지러 못 갈 때가 있어. 다시 예약해"
아니,
'내가 선불로 돈을 냈고 날짜와 시간, 장소도 예약했는데 그냥 못가져왔다고 하면 끝난다고? '
"어쩔수 없어. 아니면 환불해줄까?"
어휴...말을 말어야지... 영국의 서비스 시스템에 뭘 기대한단 말인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고 신뢰가 가는게없다.
'됐고, 나 이거 빨리 보내야 한국가족이 가져갈 수 있으니 제일빠르게 할 수 있는 차선책이 뭐야?'
"음 그러면 택배사에 네가 직접 떨궈"
택배사 픽업을 오기로 한 날에 기사가 안오고 택배사의 대응이 이렇다? 한국에서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이곳은 갓 영국 ^ ^ 뭐 어쩌겠나. 이건 나의 선택인걸. 게다가 차도 없는 뚜벅이 이방인인나.. 어쩔수 없이 같은 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흔쾌히 승낙.
내일 마지막 수업을 가면서 택배사에 짐을 떨구면 된다.
부글부글_2) 우리의 커뮤니티 연극 실습 수업- 극장에서 65세 이상의 중,장년층들과 함께 하는- 의 쇼케이스가 2 주 앞으로 다가왔다. 나와 동료 둘이서 이 쇼케이스의 공동 연출? 을 맡았다. 공연예술을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라면 알 것이다. 세 명이서 공동 연출을 한다는 것이 어떤 부대낌을 낳을 수 있는지...
게다가 한 명은 전혀 공연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없다, 한명은 작년에 막 공연예술과를 졸업한 스물 세 살의 친구... 실전 경험이 없지만 아마도 이론은 아마도 나보다 훨씬 빠삭할 것이다. 나? 경험이야 있다면 있지만 그래봤자 어디까지나 영어가 딸리는 아시안 쭈구리. 왱알왱알.
이러한 상황때문에 우리의 회의는 늘
나의 아이디어 제안 -
아이디어 좋은데?! 둘의 수렴-
진행방향 논의-
나의 무대 그림/ 동선 제안- 이거 글줄로 쓰기보다는 표의 형태로 쓰는게 참여자들이 읽기 좋지 않을까?
그 둘의 생각: 노노, 그거 별로 안 필요한듯..
(나의 머릿속 그림을 더 잘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음) 아, 응, 그래... 너희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뭐. (쭈글)
문서 제출 후 교수님의 피드백: 음. 이건 표로 만들어야 겠어.
그 둘: 네! 그럴게요!
.
.
뭐 이런 상황들의 반복이었다. 나의 영어가 부족해서 인지, 아니면 내가 경험이 전무해 보여서 못미더웠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쇼케이스를 생각하는 그림은 항상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공연 일자가 다가올수록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가 배우들(중장년층 참여자들)이라면 이 글을 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좀 어렵지 않을까? 질문거리만 많이 생기는게 아닐까?..
어쨌든 나의 방법을 버벅거리며 매번 설득시키는 모습에 그들도 약간 지쳤는지 언젠가부터는 이야기를 흘려 듣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응, 그래 그래 시호. 무슨 말인지 알겠고 네 생각도 매우 훌륭해! BUT, (사실은 but부터가 하고 싶은 말임을 나는 이제 알지)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고, 이번은 이런 방법으로 해보면 어떨까? (저기, 다음은 없어 친구야.)
답답과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다. 게다가 담당 교수님은 나에게 '시호, 너는 왜 하는 일이 없지? 너희가 하는 거 모두 점수에 들어가는 거야' 라며 슬슬 압박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아니, 저 일 하고 있다고요... 다만 영어가 딸리니까 마지막 마무리를 저 친구가 할 뿐이라고요.. 라고도 나는 설명할 줄을 몰랐다. 젠장!!!
이러한 자잘자잘한 수업에서의 압박, 수업 외 친구들과 토론시간에서의 부대낌, 집을 구하는 시기의 불안정함 등이 맞물려 '박시호'라는 배가 서서히 좌초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을 나는 몰랐다. 아니, 그 조짐을 무시했다. 배가 살살 아파오는 날이 잦았다. 나는 무시하고 있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다.
'어이, 지금 너 약간 위험해.'
못 들은 척 했다. 너의 말에 귀기울일 여유 따윈 없어. 나중에 들어줄게. 시간나면.
쇼케이스 전 마지막 리허설 날, 나는 이 수업을 끝내고 룰루랄라 학기를 마치면 되는 거였다. 아침에 여행가방을 택배사에 떨구고, 가볍게 리허설을 진행- , 수업이 끝나면 미리 약속된 집 몇 군데를 보면 끝!
기분 좋고 활기차게 택배사에 도착했는데, 아니. 뭔가 도큐멘트가 빠졌다는 거다. 지금껏 이렇게 보내왔는데요?? 말인 즉슨 영국에서 이탈리아로 보내는 짐이니 내용물의 리스트도 여행가방 겉에 함께 붙여야 한다는 거다. 아니, 어제 그런 이야기 없었는데...
수업시간은 다가오고, 갑자기 어디서 프린트를 할 곳은 없고, 나는 아주 당혹스러웠다.
'저기 시호, 미안한데 우리 이제 수업하러 가야할 듯...'
마음도 불편하게 우리는 극장에 도착했다. 나는 염치 없이 극장 담당자에게 리스트 인쇄를 부탁해야만 했다. 리스트 지가 인쇄되었다. 오전 열한시 언저리에 픽업이 되어야 제 날짜에 도착할텐데, 지금은 열한시 반, 수업은 11:45에 시작이다.
'시호, 오늘 리허설 진행 네가 할거지?'
내막을 알리 없는 팀원 중 한명이 생글대며 묻는다. 어. 그래. 그건 그런데... 나 지금 택배를 부치러 잠시 다녀와도 될까?
'뭐? 진심이야?;'
안다. 말도 안되는 요청인걸 안다. 리허설 10분전에 택배를 부치러 간다니 미친 소리지. 그런데 지금 너무 다급해져 버린 걸 어떡해... 안 그러면 나중에 30만원이 깨질텐데. 가족 편에 한국으로 못 들려 보내면 받을 사람도 없는 로마에 이 짐이 혼자 덩그라니 남게 된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저 멀리 교수님이 등장했다. 젠장. 젠장...
'어떡할거야 시호? Up to You.' 친구가 한번 더 다그쳤다.
극장담당자가 프린트를 가지고 등장했다. '여깄어 시호, 금방 했지?'
우와아아아앙!!!!!!
나는 그야말로 포효하며 울며 주저 앉아버렸다. 꺼이꺼이 울었다.
시간 상 이젠 보낼수도 없는 택배와, 준비할 마음도 안 생기는 이 리허설, 그리고 멀리서 교수가 나를 보는 쟤 왜저러고 있나 하는 표정, 그리고 동기들의 황당해 하는 얼굴들이 모두 겹치면서
왜 이딴 상황 안에 나는 놓여있나, 도망가고 싶다. 하는 생각들이 마구 내 머리를 때렸다.
그러나 사실 난 이런 상황에서 도망가거나 째 버릴 베짱같은 것도 없는 인간이다.
정신 차려야 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어푸어푸 세수를 했다. 어차피 택배는 지금 부칠 수 없다. 하루가 더 늦어지는 것을 감안하자. 이 수업을 버릴 순 없는 일이다.
눈이 시뻘개져있었다. 어쩔수 없지. 정신차리자. 무너지면 안돼. 오늘은, 지금은.
화장실 문을 열고 강철같은 얼굴로 나섰을 때, 한 떨기 햇살이 정말 무심하게도 따뜻하게 이마에 내리쬐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가 잘 없는 터라, 참가자들은 저마다 신나고 행복한 얼굴로 방긋방긋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좋겠다. 당신들은.
리허설?
초반은 좋았으나 역시나 예상대로 밀려드는 질문 공세에 우리는 허덕였다. 멀리서 우릴 보는 교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보다 못해 교수가 끼어들었다. "너희들, 이 이름 리스트에 대해 조금 더 제대로 준비했어야 하는 것 같아. 그리고 매 씬에 누가 나오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요, 다 관리 한거라고요)"
모두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저격을 받은 우리는 멘탈이 흔들려버렸다. 특히 나는. 어떻게 마쳤는지 기억도 안나는 채로 우야무야 마무리 해버렸다. 심하게 자괴감이 들었다.
리허설을 이런식으로 해 치워 버렸다고?
나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내가 하자던거 저들이 이해를 못 해서 그냥 놓은거였는데, 그 지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한 교수도 어쩐지 야속하고, 친구들도 야속하고, 택배사, 학교... 그냥 다 밉다.
내가 무얼 더 어떻게 했어야 했나?
그럴 수나 있었나?
번역기라도 써서 "얘들아 그래도 내가 너희들 보다 경험이 이 분야로는 더 많은데,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 라며 끈질기게 설득했어야 했나?
늘 실패의 마지막을 자기 탓을 과하게 하는 것으로 수렴하는 나로서는 정말 암담, 참담 그 자체인,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집으로 그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움찔 나와 버린,
내가 이렇게나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 임을 알아버린,
마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울어버리기나 하는,
정리되지도 않고 아프기만 한 머리와 생각들로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 무겁다.
그런데 너, 떠날 거 아니잖아. 진심은 아니잖아. 어떻게든 12월까지 버텨야 하잖아.
그 와중에도 여기 사는 것의 좋은 점을 굳이 굳이 찾아야 하잖아.
하지만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마지막 수업의 잔상이 너무 깊게 머리속에 박혔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뭔가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랩톱을 꺼내들었다. 수업은 끝났으니 더이상의 리플렉션 노트는 이제 점수에도 안 들어가고 필요도 없는 시점이나 이 억울함과,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미연에 방지해야겠다는 마음을 담아 에세이를 써내려갔다.
점수야 어떻든 교수님은 내 제출물을 게시판에서 읽을 것이다.
이만큼 절박했구나. 노력은 했구나. 정도는 알아주시겠지. 뭐. 아니어도 상관없고.
이전 학기에 2,000자 에세이를 그렇게 삘삘대며 썼었는데
이 억울함을 상소(?)하는 목적의 마지막 문서는 1,500자를 그냥 거뜬히 넘은 것 같다. 오. 좋은 글쓰기 연습이다. 하하하.
긍정. 또 긍정.
SEND!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
내 손을 떠났어! 난 상소문을 올렸다고!
이제는 길을 돌아서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
약하고 깨질 것 같은 순간마다 주저앉아 울어버리기 보다는 (그런데 울어버리는 것의 힐링효과도 분명히 있기에, 아예 안 울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때 이렇게 광광 울어버린 것이 나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앞으로도 어쩌면 더 자주 만나게 될 이런 답답하고, 스스로가 멍청해 보이는 순간을 어떻게 인정할지, 어떻게 괜찮게 다독일지, 나를 더 미워하지 않게 될 지, 어떻게 "좋은 경험이었다"라며 끄덕이고 넘어갈지.
그런 것들을 생각해 봐야 한다.
아니, 이미 어쩌면 이렇게 한 단계는 (찢어질 듯 아팠지만) 성장하고 있는 것 아닐까.
탈피하는 곤충들은 사실 그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럽다던데. 번데기에서 나비로, 혹은 껍질을 벗으며 점점 커가는 꽃게 들도. 그렇게 죽을듯 살을 찢는 고통을 느끼며 그 다음 몸으로 변하는 거라던데.
탈피하다가 포기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워 죽는 곤충들도 있다고 하니 그 아픔이 가히 상상할 만하다.
어쩌면
나도 탈피하고 있는 중이 아닐까.
정말 고통스럽지만, 그냥 희미한 존재인 채로 안 커버리면 어떨까 싶지만,
그럼에도, 그러면서 조금 더 선명한 무늬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감성 파괴 모먼트)
나비 이야기 하니
갑자기 그냥
꿀을 빨고 싶어지는 건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