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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일 놈의 UPS (1)

멍청비용 플렉스 끝판왕 등판 - *고구마 경보 있음

by Siho

괜찮으면 괜찮은 채로 괜찮았을 텐데

근 한 달이 넘게 몸과 마음의 부대낌은 안정을 찾을 줄 몰랐다. 저번 편에도 언급한 캐리어(suitcase) 배송이 계속해서 나의 덜미를 잡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커뮤니티 퍼포먼스 수업이 바야흐로 종강되었다는 것(야호!). 부활 주간(Easter break)이 시작되면서 사실상 모든 강의는 끝. 4월 말까지 써야 하는 에세이 두 개와 9월 초 제출로 예정된 논문까지, 이제 바야흐로 나 혼자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긴 마라톤을 위해 우선은 숨을 돌리자.

마지막 수업을 마치자마자 공항으로 향했다. 방학을 맞이해 들어오신 어머니를 베니스부터 에스코트해 이탈리아 여행을 시켜드릴 참이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공항으로 향하는 마음이 벌써 두근두근 하다가 울컥하기도 하다. 나 생각보다 많이 서러웠구나. 나 꽤나 힘들구나. (말이 통할) 내 편을 만날 생각을 하니 코끝이 시큰하다. 가족. 가족을 만나러 간다.


이스터 기분을 내려 구매한 달걀 모양 초콜릿도 하나 꺼내먹으며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있는데 기숙사 같은 집을 쓰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잘 안하는 친구인데 무슨 일이지?


"시호, 지금 너 방 안에 있어?"


"아니, 나 기차 타고 맨체스터 공항으로 가고 있어. 무슨 일이야?"


"지금 숙소에, 어떤 이상한 남자가 들어와서 방마다 문을 부술 듯 두드리고 있어!!"


"무슨 말이야 그게? 차분히 이야기해봐"


말인즉슨,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쿵쿵쿵하는 발소리가 들리더란다. 우리 기숙사는 나와 또 한 명의 중국 여자학생, 그리고 이 친구 Murgen (혼자 남자) 밖에 없기 때문에 발소리라는 게 들릴 일은 거의 없다. 이상한 조짐을 느낀 이 친구가 나가보니 웬 남자가 우리 방문들을 막 두들기며 "여기 있는 거 알아! 당장 나와!" 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더란다. 누굴 찾는 중이냐라고 묻는데 대답도 않고. Murgen이 나보고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럴 리가 없잖아!


"Murgen, 그 사람 좀 위험한 것 같아. 부엌에 있지 말고 네 방으로 가!"


"어, 안 그래도 뭔가 손에 너클 같은 걸 끼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좀 겁이 나서 지금 방으로 와서 문을 잠근 상태야. 너도 혹시 방에 있으면 문을 잠그라고 말하려고 전화한 거야!!"


심장이 두근댄다. 두렵다. 문을 잘 잠그지 않고 사는 우리 셋은 너무 평화로움에 익숙해져 있던 것일까. 창문으로도, 어디로도 외부인이 침입할 수 있다는 것을 기숙사에서 늘 경고했었는데, 늘 문을 잠그라고 했었는데.

내가 지금 기차를 타고 있지 않고 방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갔어?"


"몰라, 부엌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그런데 나가 볼 순 없어. 나도 무서워! 전화번호를 찾아서 기숙사 사무실에 신고는 해 뒀어"


"당연하지. 우선은 그냥 있어. 오피서가 올 때까지 절대 나가보지 말고."


나중에 나가보니 부엌이 이 모양이 되어 있더란다. 선반과 찬장들을 뒤지며 "여기 있는거 다 알아!" 하고 소리쳤다니 어디가 아파도 아픈 분임에..

공항 도착이 가까워 온다는 방송이 나온다. 뛰는 가슴을 좀체 진정하기가 어렵다. 내가 방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저번 화 의 소동과 무려 같은 날 이다) 복잡 다난한 일을 매듭짓고 떠나는 이 즐거운 여행길에 이게 웬일이야.

정말이지

어느 것 하나 편안하고 순탄하게 흘러가는 일이 없다.

요새 왜 이러지? 나의 문제인지 이 나라의 문제인지, 시기의 문제인지...

심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지루한 것이 가장 고급스러운 행위 라던 고현정 선배님의 유퀴즈 방송 장면이 떠오르며... 나는 그럼 이 순간 한없이 가난한 것인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싶다.



그런데 공항에 내려 라운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한 술 뜨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액땜을 한 것이 아닌가? 저 방에 내가 문을 연 채로 있었다면 여전히 '무슨 일'이 더해진 것이겠지만 나는 지금 운 좋게 한 시간 차로 그 일을 피해 왔지 않나? 그렇다면 이제 힘든 일은 (당분간) 끝났다고 봐도 무방한 것 아닌가. 그렇게 애써 생각하니 마음이 한 결 편안해졌다. 이제 엄마와 만나서 즐거운 여행만 이어가면 된다. - 라고 믿었다.


엄마 편에 한국으로 들려 보내려, 베니스-피렌체-로마로 이어지는 긴 기차 여정에 계속 끌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택배 배송업체 UPS에 떨구고 온 15킬로짜리 캐리어. 이 녀석이 우리의 마지막 숙소인 로마 에어비앤비로 잘 도착만 해준다면 아무- 일도- 어떠한 유혈 사태(?)도 없을 거였다.


그렇게 원만할 리가. 나는 유럽을 우습게 봤던 거지. 여기가 한국인 줄 알았던 거지. 도착일자가 3.24일 예정 이면 정말 그날 도착 할 줄 알았던 거지.


자아.


왼쪽부터 보면 된다


20일에 택배 수거하는 곳에 떨군 캐리어는 프랑스에 도착하는데만 무려 4일이 걸렸고 세관문제로 며칠, 새로 스캔하는데 며칠, 이태리에 도착할 때까지는 이틀이 걸렸고 세 번째 장 중간에 보면 Uncontrollable event (이런 일이 정말 자주 발생함)가 발생해 칼피(Calpi)라는 선적장에 '여태' 방치되어 있다. 어머니는 27일 출국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 캐리어를 여태 받지 못했고, 가지러 갈 사람도 없는 상태.


본디 이번 주는 이탈리아 여행기를 적을 생각이었으나. 즐겁게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엔 여행기간 동안 줄기차게 나의 배터리를 잡아먹은, 하루에도 근 20번은 한 것 같은 UPS 택배추적 이슈가 너무 커서 안 적을 수가 없다. 그리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이 놈의 캐리어로 인해 내가 날리게 된 수많은 멍청비용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기록을 아니할 수가 없다.


미리 **경고**

누군가 이 글을 읽고 나와 같은 경험이 [부디] 없으시길 바라며 써내려가지만, 답답하고 멍청한 일의 연속인, 고구마 같은 이 상황을 허허허- 하며 흘려보내시기 어려운, 글쓴이의 감정과 동조가 잘되시는 분들은 그냥 여기까지만 읽으시기를 권한다. 왜냐면 너무 멍청하니깐. 하지만 '나의 오늘 하루가 꽤나 힘들었다, 지친다' 하시는 분은 읽으시면 좋겠다. 왜냐면 여기 더 암담한 사람 있어요!


우선 저 놈의 UPS가 왜 문제인고 하니,

맨체스터에서 베니스로 가는 비행기에 캐리어를 분명 실을 수가 있었단 말이다. 29파운드(약 6만 원) 정도 내면 체크인 할 때 부치고 다시 찾아서 여행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 가방을 여행 내내 끌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경험해 본 바 이탈리아의 길바닥은 옛 시대의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자잘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캐리어는 그 골과 골 사이를 누비며 달달달달달달 죽는소리를 내지른다. 그 엄청난 진동에 귓속까지 간지럽다. 노노. 이건 아니지. 그래서 비슷한 값의 28파운드 하는 국제택배 서비스를 맡긴 것이다.


처음에 (저번 편 참고) 택배를 제 때에 부치고 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 다시 수화물 추가 비용을 검색해 보니 59파운드(약 12만 원)로 올라있었다. 몇 시간 후면 비행이니 값이 올라있을 수밖에. 12만 원?? 불가한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24일 예정이었는데 하루 늦게 픽업하니까 25일이면 오겠지' 하는, 상당히 나이브한 마음을 품은 것. 한국이라면 응당 그렇잖아?


하지만 놉,

택배는 우리가 떠나는 날이 되도록 오지를 않는다.

떠나는 날 어머니와 바티칸 투어를 하면서도, 미켈란젤로의 역작을 눈앞에서 마주하면서도 나는 천지창조의 순간에 감탄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창조주와 아담의 손가락이 맞닿는 그 장면을 보자 '아차, 택배위치 다시 조회해 봐야겠다' 하는 생각만.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중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

응... 어서 오라고 짐 싣고 배 떠날 거라고 하는 그 장면을 보니 캐리어 없이 비행기 타는 엄마 모습만 그려지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중 <노아의 방주>


아마 나만큼 불경스럽게(?) 바티칸 투어를 마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제발! 우리가 공항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캐리어가 도착하게 해 주세요!'라고 투어 내내 간절히 기도했으나 이런 내가 괘씸하셨던지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 어쨌든 쇼는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캐리어에 때려 넣을 생각으로 구매한 올리브며 과자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의 여행배낭에 꾸역꾸역 들어갔다. 담을 가방이 없으니 내 배낭도 사용되었다. 큰 배낭 두 개를 짐으로 꽉 채우고 배낭이 상하지 않게 비닐을 한번 둘러 묶었다. 그 모양이 참 처절했다.


"캐리어가 없으니 이걸 둘러메고 역까지 가는 건 좀 힘들겠다. 그렇지?"


- 엄마는 웃으면서 이 상황을 넘기고 계셨지만 자책몬 시호(나)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로마 숙소가 너무 비싸서 호텔로 예약하지 못하고 오래된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잡은 나의 선택이랄지... (역에서 걸어서 13분이라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10킬로 배낭과 함께 일 때는 전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찾아간 에어비앤비가 너무 노후되어서 옆방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고, 새벽에 계란프라이를 해 먹는 다른 숙박객이 있지를 않나... 잠귀가 예민한 나는 몇 번이고 일어났고,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쌕쌕 잘만 주무셨고-


택시를 불렀다.

기다리면서 나는 노모의 어깨에 지워진 엄청난 배낭을 보며 또 빈틈없이 후회했다. 이 모든 상황이 내가 만든 것이었다. 돈을 아끼겠다고 체크인 배기지를 더하지 않은 선택, 역 앞 호텔이 아닌 멀리 에어비앤비를 잡은 선택… 일주일이 채 못 되는 엄마와 함께하는 귀한 시간 동안 내 신경이 온통 택배의 도착에 곤두서 예민해져 버려 엄마에게 때때로 짜증 냈던 모습들이 스친다.


한심하고 또 한심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양껏 UPS탓을 해보지만 사실 그 조차도, 몇 파운드 더 비싼 DHL을 고르지 않은 나의 선택이었다. 그만! 자책은 잠깐 접어두고 이제 이 붕 뜬 택배를 누가 받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해야 한다. 영국에 와서 생활하며 '변수'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초 단위로 생기는 이변에 이제 정말 눈앞이 아득하다.


우선 우리가 떠나도 이 택배를 받아줄 수 있는지 에어비앤비 주인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여쭤본다. 사실 도착하기로 한 날짜부터 지금까지 매일 이 택배를 기다려 준다고 외부 일도 못 하고 숙소를 지켜 주신 터라 (여기는 우리나라처럼 문 앞에 던져두고 가질 못한다. 무조건 사람이 나와서 받아야 한다. 벨을 눌러봐서 사람이 안 나오면 그냥 다시 가지고 가버린다... 한국 택배만 한 곳이 없지) 이미 너무 죄송함에도.


"너는 너무 좋은 손님이었어! 옆방 시끄러운 것도 다 참아주고! 당연히 챙겨둬 줘야지. 내가 택배가 오면 잘 맡아주고 있을게. 언제라도 찾으러 와"


너무 흔쾌히 상황을 받아주시는 할아버지. 너무 감사하다. 집 후지다고 툴툴거린 거 죄송해요.


자, 다음은 이제 이 캐리어를 받으면 어떻게 한국으로 가져갈까 가 관건이다. 내가 이걸 들고 한국으로 가는 건 말도 안 되고... 나는 곧 만나기로 한, 2주 뒤에 한국으로 들어가는 런던의 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는 언니네서 며칠을 머무르며 아이들도 봐주고, 언니와 밀린 이야기도 할 작정이었다.

어휴. 근데 이거 너무 심한 민폐인데. 초등학생 아들 둘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는 것만 해도 이미 엄청난 여정인데 내 캐리어를 들고 가달라고 하기가... 하지만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다. 나중에 중요한 순간이 오면 정말 크게 은혜를 갚기로 마음먹고 염치 불고하고 부탁한다. 언니, 제발!!!


나의 귀인 언니... 사랑합니다


거절했었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언니는 가능한 한 끙끙대고 끌고 가 보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세상에 이런 천사가 있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마워요 언니.


좋아. 가져갈 수 있으니 우선 되었다. 이제 엄마와 공항에서 체크인하고, 라운지에서 만나서 저녁을 냠냠한 뒤, 나는 런던 언니네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엄마는 아시아나로 편안히 목적지까지 도달하면 될 터다.

- 로마 피우미치노공항은 터미널이 3개나 있어서, 어머니와 라운지를 함께 이용하려면 터미널도 같아야 한다. 나는 진즉부터 아시아나가 터미널 3이라는 정보를 입수, 터미널 3에서 비슷한 시간에 출발하는 로마- 런던행 저가항공을 예약해 뒀다-. 스스로 뿌듯했었지. 자, 가요 엄마!!


그. 런. 데.

끝내고 싶어도 끝나지 않는 돌발 상황. (이제 적응마저 되려 한다)


어머니의 아시아나 비행기가 지연된 것이다. 뭐라고???? 이유인즉슨, 중국항로가 폐쇄되어 그 길을 쓸 수 없다는 것. 아니 하늘 길도 폐쇄가 되는 일이 있는 건가.

고로 내 비행기는 18:30에 뜨고, 엄마의 체크인 시간은 2시간 미뤄져 18:30.

결국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어휴. 어휴. 어휴!


엄마는 빨리 타고 가라며 등을 떠밀었지만 나는 어쩐지 엄마와의 귀한 시간을 뺏기가 싫었다. 그간 잘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엄마와 지금 두 시간 더 있고 바이바이 하고, 런던엔 내일 가자. 6만 원 정도 주고 산 이 티켓, 그냥 버리자. 혹시 올지 모르는 그놈의 UPS택배도 하루 더 기다려 보고. 안 그러면 택배 찾자고 로마엘 다시 와야 하니까.


결국 나는 런던행 비행기를 날렸다. 비행기표를 날리다니. 마흔 평생에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럭셔리하네.

어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데 참 슬프기도, 서럽기도,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참 많은 감정이 올라왔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또 줄줄. 눅눅이 시호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출국신고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공항버스를 타고 다시 현실로, 시내로 돌아왔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변수들을 다시 그러모아 정리해야 한다.


우선 오늘 숙박. 그리고 내일 비행기.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표 검색. 잔고는 계속 줄어가는데 할 일과 나갈 돈은 계속 새로 생겨나는 마법

엊그제까지 묵던 숙소는 하루에 70유로로 다소 비쌌기 때문에 역 근처 대충 잘 곳을 알아본다. 호스텔들의 평점이 너무 낮다. 소음, 벌레, 담배연기 모두에 취약하고 예민한 나는 유일한 비빌언덕, 에어비앤비 할아버지에게 다시 연락한다. '할아버지. 정말 죄송한데 하루 더 묵으려는데 좀 싸게는 안될까요. 저희 방 아직 안 치우셨으면요...'

할아버지는 고민하더니 우선 어서 오라고 한다. 비도 오는데.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했던가. 나는 끅끅 하고 눈물을 참고 있다가 숙소에 도착해서 엄마가 누웠던 빈 침대를 보고 나서 그만 눈물이 펑 터져버렸다. 또 광광광. 아유 지겨워. 쓰는 나도 지겹게 정말이지 맨날 우는구나.


세르지오 할아버지와 그 부인이 다가와서 나를 달랜다. 아마 내가 비행기를 놓쳐서 슬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설명할 여력도 힘도 없어서 그냥 있었다.


"배 안 고파?? 허기질 것 같은데 뭐라도 먹어야지" 할아버지가 뭔가 먹는 시늉을 하며 묻는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라운지를 즐길 생각으로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배가 고픈 것도 몰랐다. 내 선택으로 잃어버린 수많은 비용을 생각하면 돈을 써서 뭘 나에게 먹이고 싶지도 않았다. 굶어라 굶어.


'괜찮아요'라고 하려고 했던 나는 뻐끔대며 "네, 저 배고픈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 몸은 정말 솔직하구나. 지칠 대로 지친 나의 마음은 이제 머리와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예의와 격식 같은 것은 지금 나에게 사치.


정말 맛있고 눈물나는 볼로네즈였다

할아버지는 볼로네즈 스파게티와 따뜻한 차를 내 오셨다. 괜찮아. 따뜻하게 하고 잘 쉬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문을 닫고 나가신다. 염치없이 허겁지겁 먹는다. 배가 부르니 피곤이 몰려와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안되는데... 내일 어떻게 할지 비행기표도 새로 사야 하고... 비행기표를 검색해 보니 맨체스터로 가는 표는 다소 저렴. 런던으로 가지 말고 그냥 랭커스터로 돌아갈까. 내 방에 가서 쓰러져 쉬고 싶기도 하다.


아냐. 언니에게 하루 간의 자유를 주기로 약속했었다. 아이들 보느라 늘 저녁 공연을 못 보니까 내가 아이들을 봐줄 테니 신나게 놀고 오라고. 그 자유를 뺏을 순 없다. 하루를 있더라도 런던으로 가야지.

비행기가 생각보다 많이 비싸다. 하하하. 어머니와 함께 한두 시간의 대가가 꽤 크군. 어제 그냥 돌아갔어야 하나. 며칠 새 멍청비용이 계속 술술술 새는 것을 보면서 이제 이런 멍청한 지출에도 이제 무뎌진다. 다 경험이야. 경험. 나는 경험을 비싸게 사고 있는 거지. 응. 아직도 사야 할 경험이 많으려나? 이쯤해서 그만 사도 될 것 같은데.


아아 이제 자야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깨끗하고 포근한 침대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것에 일단 감사하자.


변수인생. 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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