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트는 나사야 나사.
오늘은 듀크 시어터에서 열린 Creative Ageing 심포지움 첫날이었다.
저번 학기에 우리 학과의 동기들과 함께 진행한 Primetime 워크숍의 참여자 분들이 이 심포지움에서 프라임 타임에 대해 발표하고, 다양한 공연도 선보이게 된다.
오랜만에 참여자 분들도 뵙고 응원 할 겸, 라운드 테이블에서 패널로 나오시는 교수님도 뵐 겸 겸사겸사 가게 되었다. '창의적 나이듦'이라... 처음에는 이 테마가 별로 와닿지 않았다. 중년 혹은 노인분들을 위한, 어떻게 하면 노년이 안 심심할까와 같은 심포지움이겠거니.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빼곡히 일정이 짜여있었지만 적당히 보다가 일찍 나와야지 생각했다. 다음주 까지 제출해야 하는 5,000자 에세이도 있고. 심포지움에 하루를 전부 쓰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기다. 몇 분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참여자 분들 얼굴도 봤으니 슬슬 갈 참이었는데 웬걸, 점심을 준다니? 그러면 잠깐 머물까.
늘 그렇듯 이런 행사의 주최측은 꼼꼼하게 비건, 베지테리언, 글루텐프리 식단을 구비해 둔다. 아예 비건 음식으로만 구성이 되어있었다. 그래, 그러면 모두가 먹을 수 있지.
야무지게 샌드위치 쿠키, 차를 곁들여 먹고 있는데 오늘 공연을 3개나 하는 할아버지 Chris가 보였다.
"크리스!"
"오, 이게 누구야!!! 시호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걸?"
"그러게요. 조금 있다가 또 공연 하나 하시죠?"
"응. Clowning(광대극) 할거야"
"와... 너무 멋져요. 떨리지 않으세요?"
"전혀"
"안 떨리신다고요???"
아니, 바로 공연 직전인데. 아무리 이게 정식 공연이 아니고 관객이 많지 않다지만 어떻게 떨리지 않을 수가 있어요? 저는 그 쫄깃함이 무서워서 배우도 그만두었는데요.
"시호. 나이가 들면 말야. 약간의 허술함이랄까. 나사 하나 빼 둔 느슨함을 얻게 되(Gaining Stupidity). 그게 나이드는 것의 좋은 점 같아"
"허술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지. 내가 완벽할 수가 없고, 그럴 필요도 딱히 없다는 걸 알게 되거든. 그런 걸 다 신경쓰기엔 이제 머리도 좀 나빠지기도 하고. 하하"
어...또 무언가 울림이 온다.
뭐든지 꽉- 조이고 사는 나의 일상을 생각해 본다.
바쁜 것이 디폴트 값인 우리, 그리고 맞춘 듯 무언가들이 예상대로 계획대로, 완벽하게 다 돌아가야만 하는.
퍼펙셔니즘, 결국 또 그 얘기다. 절대 나는 완벽에 가까울 수 없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앎에도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왜 이거밖에 못했냐'며 자주 채찍질하고 책망한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목표치가 높다 보니 무엇을 해도 스스로에게 만족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공연, 프리젠테이션, 발표, 면접, 늘 실전에서는 연습보다 못했던 것 같다. 너무 떨어서,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에 더 망치는 그런 악순환의 고리인 것이다.
나사 하나쯤 빼 두고 사는 것. 그게 나이가 들면서 얻는 최고의 이점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까?
우리가 프라임 타임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계속 강조한 단어가 Intergeneration, 그러니까 세대 간 소통, 세대 간의 교류인 셈인데 실은 '세대 간 교류'라는 것이 (말은 참 좋지만) 결국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사람들을 모시는 이야기 아닌가라고 넘겨짚었었다. 꽤 오래, 그 생각은 나의 머리속에 진한 글씨로 '저들을 보살펴야지. 나이 들어 외롭고 쓸쓸한,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그런 존재들을 우리가 보듬어야지'라고 거만하게 쓰여져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터 제너레이셔널은 서로가 서로의 서툼을, 혹은 나이 들어감을, 혹은 아직 영글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바라보고 껴안는 과정이었다.
첫 수업이 끝나고 난 뒤에 참가자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젊다는 건 참 좋은 거야. 그러니까 우리를 상대로 얼마든지 실험하고 테스트해보고 배운 것들을 실습해 봤으면 좋겠어.
무엇을 하든 너희들은 참 귀한 사람들이야, 너희의 도전은 늘 아름다워.
그리고 우리는 그런 너희를 보는 게 너무나 즐겁고 신난다?
십년 도 더 전에 한 주민센터에서 했던 수업이 생각난다. 단편적 예일 뿐이지만 팔짱을 끼고 앉아 '나도 한때는 한가락 했어. 그런 나를 너희가 가르쳐?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표정의 어르신들을 보며 '자신들의 색깔로 이미 가득한, 나이가 찬 분들에게 수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는 않은 일이구나. 내 생각이며 색깔을 덧입히는 것이 결코 쉽지 않구나. 어쩌면 이미 나보다 더 짙은 색의- 더 단단한 블럭들을 몸 안에 쌓고 있는 사람들의 블록을 빼서 다시 조립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구나.' 하고 나는 단정지어버렸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수업이라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색 위에 나의 색을 덮거나 혹은 어떻게든 쌓여 있는 그 블록을 꺼내서 다시 조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가진 색들을 꺼내어 보여주고, 나의 색이 너의 색과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를 나누고, 너의 색이 더 아름답다면 그 색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블록이 더 사랑스럽다면, 더 따뜻하다면 그 따뜻함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를 서로 궁금해하는 과정에 가깝다.
크리스 할아버지가 나오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나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다음 세션을 계속해서 들었다.
맨체스터에서 온 중년연극팀의 공연도 정말 높은 수준으로, 나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영국은 중년배우들로 이루어진 공연팀이 꽤 많다. 단순히 노인 복지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어프로치가 있는 것 같다. 한국도 분명히 중년 분들의 공연이 많았는데 왜 결이 그렇게나 다르다고 느껴질까?
표현력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표현과 행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중년 세대들은 어느 정도의 고정관념, 혹은 양반처럼 점잖게 행동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것들 때문에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의 자기 표현 같은 것들은 늘 비슷비슷하게 보였고 딱히 흥미를 가져본 일이 없던 것 같다. 공연이라고 해도 가족과 친지들이 관람객의 전부인 뭐 그런 발표회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런데 오늘 세션 중에 The 앙상블 그룹이라는 곳의 대표가 너무나 멋진 공연 영상을 공유해주었다.
내가 집에서 꽃을 심고 키울 때는 그냥 정원을 가꾸는 사람일 뿐이었는데, 내가 키우는 꽃을 그리고 표현하고 그것을 집 밖으로 들고 나왔더니 나는 예술가가 되었다라는 한 참가자의 인터뷰로 시작한 그들의 영상은 계속해서 나의 마음을 잔잔하게 두드렸다.
표현이 매끄럽거나 완벽하지는 않아도 영상 속에서 그들의 몸사위는 표현을 넘어선... 글쎄, 그것을 연륜 혹은 관록이라고 해야 할까?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냄새 같은 것을 담고있는 그 동작 하나하나는 분명 하나도 완벽하지 않았는데 그 자체로 고소한 향기 같은 것이 났다.
이런 건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 진짜 공연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중장년층의 공연들이 가족및 친지만을 대상으로 하는 내수(?)시장에서만 소비가 되고 마는 이유는 어쩌면, 이 사람들의 이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플랫폼 혹은 기획이 부족해서 아니었을까. 아니,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이것은 기획자 혹은 그럴 만한 자리를 만드는 사람들만의 문제라기보다는 대중들의 수준, (다르게 말할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회의 시선 혹은 기다려 주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의 부재도 있지 않을까.
표면적으로만 재단하자면 오늘의 공연 중에 완벽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때때로 지루하고, 과하거나 느리거나, 전달이 잘 되지 않거나 재미없던 순간도 많았다. 그러한 순간을 이해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읽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 그런 마음속의 기다림과 여유가 우리에게 있을까.
서툴고 어색한 대사, 소위 마가 뜬다고 하는 그 구간들 사이에서 이들이 생각하고 발화하는 어떠한 덩어리들을, 그 사이 사이에 숨겨져 있는 무엇들, 에너지들을 우리의 관객은 느낄 수 있는가?
오늘 공연에서 나는 관객들이 기꺼이 기다리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70년을 이 곳에서 산 사람의 삶의 자욱, 그 깊이, 겹쳐진 선들, 쥐었다가 펴는 손에서 느껴지는 진정한 마음 같은 것...그게 정말로 펼쳐 보여질때까지, 먼지가 날리며 옷깃을 푸덕이는 그 동작 하나하나를 관객들은 받아들이고, 마음에 꼭꼭 눌러 담았다. 어쩌면 관객들의 그런 모습조차도 너무 감동적이었다.
실은 공연을 보는 중에 하나의 이슈가 있었다. 한 관람객이 지체 장애가 있는 아들로 보이는 가족을 데려왔는데, 그 지체부자유인 아들은 공연 중에 때때로 소리를 지르거나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는 했다. 배우가 대사를 할 때마다 자기도 무언가 대답을 하거나 의사표시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때문에 (안그래도 전달력이 높지 않은) 중년 배우들의 대사가 잘 안 들리지 않아 집중이 흐트러지는 때가 많았다.
적잖이 신경 쓰였다. 왜 왜 저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는가?
공연에 이렇게 피해를 주고 있는데 왜 데리고 나가지 않는가?
왜 조용히 시키지 않는가? 왜 주최 측은 저 모자를 끌어내지 않는가?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니,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그 모자를 쳐다보거나 혹은 아무것도 제지하지 않는 주최 측을 노려보거나 하는 이가 없이 모두가 공연에 몰두하고 있었다.
잘 들리지 않을 때마다 더 눈을 크게 뜨고, 더 공연에 집중하려고, 더 배우의 입모양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내보내면 되는 일 아닌가? 한 명의 관객 때문에 약 4~50명의 관객들이 대사를 듣지 못하고 있는데도 누구도 그를 바라보거나 질타하거나 내보내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했다.
'엇'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럼 이와 같은 장애가 있는 사람은 절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공연장에 들어올 수 없는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연을 무사히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관객'은 어떤 존재인가. 어떠한 관객이 적절한 관객인가. 공연은 얼마나 신성한가? 과연 공연은 신성해야 하는가? 장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공연을 봐야 하는가. 우리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존중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격리하거나, 마치 다른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 길고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오늘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한 번도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적 없었던 중년을 위한, 중년에 의한 공연, 그것의 의미, 그리고 공연과 예술의 의미. 늘 고민하던 것이지만, 고민의 너비, 그리고 깊이가 어제보다는 조금은 더 커진 것 같다.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누구를 위한 작업을 만들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과연 한 껏 조여둔 나사를 얼마나 풀어 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