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느리 Jun 16. 2023

기억은 흐려져도 감정은 남아있다


"션이 4살 때 생각나니"


"응! 벌에 쏘였던 거 생각나."


션이는 벌에 쏘인 적이 없다. 아빠가 캠핑장에서 벌에 쏘인 적이 있는데, 그때 걱정했던 기억이 커다랗게 남아있었나 보다.


션이 4살 때 유럽 8개국을 6개월 동안 여행한 적이 있었다. 투병 중이셨던 친정엄마도 함께, 3대가 함께 했던 유럽. 여행 후반부엔 육아휴직을 통해 우리 신랑도 이 여정에 조인했었다. 당시 참 많이 들었던 말은, 아픈 엄마 모시고 고생할 거라는 말, 남자가 육아휴직 쓰면 회사에서 불이익이 있을거라는 말, 그리고 너무 어린 션이는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 못 할 거라는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리 엄마는 곧 투병 5년의 마침표를 찍는다. 꿈에 그리던 말, 완치. 그리고 여행은 우리 엄마에게 살아갈 힘과 이유를 불어넣어 주었다. 신랑도 나도 힐링여행 후에 다시 열심히 회사생활 하고 있다.


타국에서의 수개월은 감정이 이 정도로 다이나믹할 수 있구나를 알게 해 준 경험이었다. 택시 한 번도 부르기 힘들었던 여행 초반의 좌절감, 비싼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굶주리던 순간,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롭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 벅차게 아름답던 석양, 그 순간 내 손을 잡아준 가족, 대자연속에서 숨 쉬며 살아있음을 느끼던 근사한 기억도 셀 수 없을정도로 많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의 유럽을 회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슬픔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감정들이 기억과 뒤섞여 마음이 몽글? 뭉클? 센치? 하여튼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확 올라온다.


"션이는 자다르 기억나니?"


우리가 3개월 동안 살았던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자다르.


"기억 잘은 안 나."


작은 목소리로 션이는 말했다.



여행 다녀와서, 이 소중한 추억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수백 장의 사진을 인화해 앨범을 만들고 집안에도 걸어두었다. 우리는 종종 사진을 보며 추억을 회상했고, 자다르와 다른 특색 있던 도시에서 보냈던 시간을 초콜릿 까먹듯 회상하곤 했었다. 그것마저 뜸해진 지금, 션이는 자다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했다.


"엄마랑 갔던 오사카는?"


"아 벌써 오사카 다녀온 지 5개월이나 지났다니. 너무 좋았는데."


아쉬워하는 션이.


잊어버려도 괜찮다. 여행지에서의 기억은 언젠가는 흐려지고 희미해진다. 그래도 그 순간마다 느꼈던 감정은 진하게 남아있다.


자다르의 석양아래서 버스킹 하는 사람들 옆에서 션이와 나는 춤을 췄었고~ 그 순간은 참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핀란드에서 산타할아버지를 만났던 순간도,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본 것도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느낀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션이 그린 자다르의 바다오르간


종종 션이는 그림을 그릴 때 그리는 것들이 있다. 하늘을 칠할 때는 파란 하늘뿐 아니라 붉은 하늘을 그린다. 파도 따라 아름답고 신비로운 소리를 내던 바다오르간. 이것도 우리 션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기억은 흐려져도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션이가 소중했던 여행의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아쉽지는 않다. 큼지막한 조각 기억들, 그리고 우리가 찍은 사진만으로도 기억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으니.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다.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혼낸 적도 많았는데, 살짝 돌려서 물어보니 기억 못 하는 듯하다. ~~~ 다행^^


오늘은 언젠가 잊힐 것이다. 그래서 상처받지 말고, 상처 주지도 말고, 후회하지 않고 덤덤하게 하지만 활기차게 오늘을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꿈꾼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다시 느껴보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엘리베이터에 갇힌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